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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an 27. 2022

가족의 시간

순환하는 계절처럼 때로는 따로 때로는 함께

남편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나들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그곳으로 나들이에 나서려고 하면 '죽은 공간'을 무엇하러 다니냐며 투덜거렸다. 보기만 해야 하는 곳, 직접적인 수확물을 거둘 수 없는 곳은 남편에게는 죽은 공간이었다. 남편에게 살아 있는 공간은 말 그대로 생명을 직접 만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풍경만 근사한 동해보다는 바지락이라도 캘 수 있는 서해를, 걷기만 하는 산행보다는 감자라도 캘 수 있는 텃밭행을 더 선호했다.


정반대의 성향 탓에 처음에는 꽤나 신경전을 벌였다. 가족을 만들지 않았으면 모를까 만들었다면 무엇이든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감 탓이었다. 모래알 같은 가정에서 자라난 탓인지 무엇이든 함께하는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죽은 공간'에만 들어서면 남편은 피곤해했다. 탁한 공기에 예민해 멀뚱히 밖에서 혼자 기다리거나 입장했다 해도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일이 예사였다. 기름진 음식에도 민감해 남편과 다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백반집이나 매운탕집을 찾아다녔다. 피자나 스파게티, 돈가스 같은  외식의 즐거움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식성과 취향이 그런 것이라서 접점을 찾기도 어려웠다. 이리저리 신경 쓸 게 많으니 나들이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일주일 중 6일은 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벌이였으므로 남편이 집에 있는 일요일(당시는 주 6일제였다.)을 제외하고는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은 무한정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 생각이 들자 굳이 남편을 끌고 '죽은 공간'을 다닐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서로에게 괴로움을 주자고 사는 것도 아닌데... 싶었다. 그렇지. 주중에 가고 싶은 곳을 다니는 거야.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는데도 나들이가 즐거웠다. 가고 싶던 장소들을 섭렵하고, 하고 싶던 외식을 즐겼다. 아이들을 앞세워 서울 전역을 누볐다.


그러고 나니 일요일, 남편과 시골로 향하는 길이 전혀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횡재 맞은 기분이었다. 도시에서만 자란 탓에 시골 정취는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시골행은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남편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말이면 아이들은 커다란 호미를 들고 아빠 뒤를 쫓아 텃밭에 모종을 심었다. 채소는 씨를 뿌려 거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씨를 뿌리기보다는 모종을 심어야 더 수확하기 좋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이들도 처음 보는 식물과 벌레들을 만지며 즐거워했다. 수박, 참외, 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 등 다양한 모종들이 남편과 아이들의 수고로 자라나 식탁에 올랐다.


하지만 시골에서의 즐거움은 열네 살을 넘기지 못했다. 세 아이 모두 중2에 접어들자 시골에서의 수고를 놀이가 아니라 노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고구마를 캐며 지렁이와 벌레의 귀여움에 어쩔 줄 몰라하던 막내마저도 열네 살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지시받는 것에 예민할 나이임을 생각지 못하고 제법 컸다고 이것저것 일거리를 안기는 부모의 탓이 컸을 듯하다. 무엇이든 놀이가 되지 못하면 고역인 법. 아이들은 더 이상 땅에서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지 않았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생명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탄성은 부모의 것일 뿐 아이들에게 가 닿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들과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시골집에 드나든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는 성묘할 때를 제외하고는 나도 아이들도 시골에 잘 가지 않는다. 회귀본능이 짙어진 남편만 지인을 모아 주말마다 시골을 찾는다.


지금은 다섯 식구 모두 제각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느라 분주하다. 창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공부를 하고, 일감을 처리하고, 작품을 구상하고... 그렇게 함께 있지만 따로인 시간 속에 담겨 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있는 평화로운 나날. 때로는 따로, 때로는 함께. 계절이 순환하듯 가족의 시간도 그렇게 순환하는 거라 생각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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