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녹음 봉사가 내게 남긴 것
녹음 봉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거리에 시각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보이지 않으므로 없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녹음 봉사를 시작하며 알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교와 도서관, 미술관, 국악단, 카페가 있다는 사실도 녹음 봉사를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10대, 20대, 30대 그 어느 시기에서도 시각장애인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학교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리에서도, 심지어 TV에서도 그들을 본 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시각장애인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녹음 봉사는 그렇게 나 자신과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녹음 봉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큰아이 고2 시절이었다. 급식모니터로 함께 활동한 한 엄마가 모니터 활동 후 티타임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발음이 굉장히 정확하세요. 혹시 아이들 가르치세요?"
아이들을 가르치느냐는 말에 나는 쿡, 웃음을 흘렸다. 틀린 말도 아니어서였다.
"가르치는 건 아니고, 막내 학교에서 그림책 읽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막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냐며 잠시 놀란 표정이던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들으니 권하고 싶어졌다며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인즉슨, 자신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를 녹음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 그 일은 발음이 정확한 사람이 할 만한 일이라는 것, 낭독 테스트를 거쳐 통과가 되면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 교육을 받은 후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녹음할 자료는 책이나 신문, 잡지, 교과서 등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주어지는 대가는 없지만 대신 봉사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등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호기심이 동했다. 어릴 때는 성우를 꿈꾼 적도 있어서 녹음을 한다는 일이 더없이 근사해 보였고, 책을 골라 녹음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끝말에 망설임이 고개를 들었다.
"근데 봉사를 시작하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해야 해요. 그리고 녹음테이프 한 면이 45분인데 그건 당일에 완성하는 게 좋아요. 다른 날로 바뀌면 아무래도 목소리 톤이 변하니까... 저 같은 경우 한 면 완성하는데 2시간 정도 걸리더라고요. 처음엔 좀 더 걸릴 거예요. 그러니까 왔다 갔다 시간까지 포함해서 시간을 내는 게 좋겠죠?"
섣부른 시작을 경계시키려는 듯 그녀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낭만으로 시작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해온 봉사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과 연결되어 있는 일이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활동이 그랬고,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을 전해주는 활동도 그랬다. 시간을 많이 내야 하는 활동들이었지만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만족감이 그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녹음 봉사는 전적으로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보수도 없고, 동료도 없고, 아이들과 함께 할 수도 없는 일. 오롯이 홀로 짊어져야 할 책임감이 호기심을 잠재웠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서너 시간을 내기 어려울까 싶으면서도 잡다한 집안일과 아이들 학교 봉사활동, 격월로 돌아오는 제사 등 자잘한 대소사가 마음에 핑계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핑계로 호기심은 내쳐지고 그녀와의 만남도 다음을 기약하며 기억에서 잊혔다.
녹음 봉사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큰아이가 고3이 되면서였다. 그러니까 순전히 큰아이의 대입에 '운'이라는 녀석을 조금이라도 보탤 요량으로 녹음 봉사를 떠올린 것이다. 행운을 맨입으로 바라기는 그렇고, 종교도 없어 대신 덕이라도 쌓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부모가 되기 전에는 뉴스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유난스럽다 흉을 봤었다. 공부는 본인이 하는 것이지 기도로 되는 것이면 얼마나 불공평하고 염치없는 일이냐... 그런데 부모가 되어 보니 '공'을 들이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게 부모의 정상적인 모습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녹음 봉사. 큰아이가 수능 보는 날,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녹음실로 곧장 향했다. 한석봉 어머니도 아니면서 '그래, 너는 열심히 시험을 보거라. 나는 열심히 녹음을 하겠다.' 그런 마음으로...
1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꼬박 녹음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이기심이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기심은 마중물에 불과했다. 책이 한 권 끝날 때마다 시각장애인이 읽을 책을 한 권 더 세상에 내놓았다는 성취감은 녹음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세계,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책을 읽고 싶어 하고 거리를 걷고 싶어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지를 알게 되어서 그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 계속 활동을 하게 했다.
올해로 녹음 봉사를 시작한 지 7년 차. 덕분에 봉사시간도 600시간을 넘겼다. 코로나로 지금은 활동을 잠정 중단한 상태지만 일상이 회복되는 그날, 나와 같은 이기심으로라도 많은 이들이 봉사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으면 좋겠다. 그 발길이 새로운 세상을 선물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