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가훈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인 적이 있다. 우리 집에는 왜 가훈이 없을까. 누가 봐도 멋진 가훈이 왜 없을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가훈을 적어내야 하는 숙제가 꼭 있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적어낸 가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훈을 마련하지 못했던 탓에 평이한 문구를 적어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후 가훈을 마련해야겠다는 압박감에 꽤 시달렸다. 그런데 영 마음에 차는 가훈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큰아이가 3학년이 되어 떠난 여행지에서 깨달음을 하나 얻고 그것으로 가훈을 삼았다.
방학이면 아이들과 여행을 떠났다. 큰아이 3학년 때는 섬진강을 따라 여행을 했다. 남원을 시작으로 지리산 노고단과 화엄사를 거쳐 천은사와 화개장터,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 최참판댁까지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그 여정에서 천은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마주오는 스님이 합장을 하며 온화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셨다.
"공양하고 가시지요."
'공양'이라는 단어를 심청전에서나 들었던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그것이 밥을 먹고 가라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감사히 마주 합장을 했다. 시계를 보니 시침이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좀 이르다 싶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밥을 먹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천은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샘물을 품고 있는 절이다. 우리 가족은 샘물을 찾아 경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계곡과 산이 보여주는 정취에 한껏 젖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스님의 말씀이 생각나 부랴부랴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식당 초입이 조용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없는 건가, 했는데 식당을 나서던 보살님이 우리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신다.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공양하고 가라고 하셔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살님의 안타까움이 죽비처럼 날아들었다.
"아이고, 때를 놓치셨네!"
12시라는 점심시간에만 익숙해 절에서의 점심시간이 12시면 끝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게 불찰이었다. 그때의 인상이 얼마나 강했던지 우리 부부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때를 놓치지 말자'를가훈으로 정했다. 첫 가훈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이 가훈은 막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때를 놓치지 않는 것보다 때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강병인의 캘리그래피 '웃자'에 감동을 받아 '웃자'라는 가훈이 잠시 자리를 잡았다가, 다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좌우명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가 슬그머니 왔다 사라졌다.
가훈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한집안이나 어른이 자손들에게 일러 주는 가르침' 또는 '한집안의 전통적 도덕관으로 삼기도 한다'. 사전을 보니 가훈을 두고 우왕좌왕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통적 도덕관을 지니지도, 자손들에게 일러 줄 만한 가르침을 물려받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험치가 달라져 자꾸만 생각이 바뀐 탓이 가장 컸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때를 놓쳤다는 생각이 정말 때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다가왔고, '웃자'는 울고 싶은 마음을 통제할 수도, '하루하루 성실하게...'는 성실에 대한 강박을 드러낼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후로 더 이상 가훈을 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훈'을 행동으로 보여주자 마음먹게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포장하는 말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행동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가훈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다.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훈을 적어내야 하는 아이들의 숙제가 사라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정한 가훈을 내밀 것 같지는 않다. 대신 여러 좋은 글귀에서 아이가 고르게 하거나 스스로의 좌우명을 들여다보게 할 것 같다. '훈'이란 스스로 찾아냈을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이 지금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