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반복적인 추천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이 영화를 꼽았고, 언젠가 출연한 방송(유퀴즈...)에서는 '죽기 전 꼭 보아야 할 영화 단 한 편을 꼽는다면'이라는 질문에 이 영화의 제목을 망설임 없이 말했다.
지금까지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세 편을 보았다. 제일 먼저 본 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을 보았다. 이번에 보게 된 <원더풀 라이프>는 필모그래프를 보니 이 세 작품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원더풀 라이프>는 1998년에 제작되었다. 그런데 영상을 찾아보니 몇 년 전에도 재개봉을 했던 모양이었다. 딱히 볼거리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난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님에도 지금까지 영화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영화는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는 곳, 림보에 22인의 망자가 차례차례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나이도 직업도 다양하다. 그들이 림보에서 해야 할 일은 소중한 단 하나의 추억을 선정하는 것. 그 이유는 단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망자와 그들의 추억을 일깨우려는 조력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중반부까지는 망자들과의 인터뷰가 주를 이루고 있어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후반부에 접어들면 망자 와타나베(나이토 타케토시 분), 조력자 모치즈키(이우라 아라타 분)와 시오리(오다 에리카 분)를 중심으로 영화는 점점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와타나베는 무덤덤한 일상이 추억일 수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모치즈키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행복이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도 추억일 수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시오리. 그녀는 추억을 선택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고 림보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단 하나의 추억을 선택하지 않는 인물이다(소중한 추억을 선정하면 그 외 모든 기억은 지워진다). 그녀는 소중한 추억 모두를 간직하는 것이 천국에 가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추억'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이 영화는 대열에서 이탈한 복제인간을 쫓는 사냥꾼의 이야기인데 개봉 당시만 해도 설정이 낯설어 흥행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영화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두 가지 장면 덕분이다. 하나는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분투하던 복제인간 '로이'(룻거 하우어 분)가 빗물 속에서 수명을 다하고 고개를 떨구던 장면. 또 하나는 사냥꾼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가 복제인간과 인간을 구별하는 잣대로 '추억'을 언급하는 장면. 복제인간은 실용성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사용 기한이 정해져 있고, 성인으로 만들어졌기에 '추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당시로선 꽤나 충격이었다.
<블레이드 러너>를 보았을 때는 20대였고, <원더풀 라이프>를 본 지금은 50대이다. 그래서일까. <원더풀 라이프>를 보고 나니 '추억'에 대한 정의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20대 때에는 '추억'이라고 하면 주로 유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반추해보아도 좋을 기억은 대부분 유년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추억'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기억에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방학 때면 숙소도 일정도 정하지 않고 떠났던 여행에 대한 기억은 '추억'이라 이름 붙이기에 손색이 없는 기억들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아이들도 그 기억을 '추억'으로 생각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추억이야! 악몽이거든!"
큰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동강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이전까지 숙소를 잡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탓에 동강으로 떠나면서도 숙소를 달리 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강은 달랐다. 그곳은 래프팅의 천국. 여름 시즌에는 여관까지도 방이 없었다. 동강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인근 마을에서도 숙소를 구하지 못해 결국 찜질방에서 밤을 보냈다. 남편은 이때의 기억이 가장 인상 깊은지 여행 얘기가 나올 때면 지금도 동강 에피소드를 가장 먼저 꺼내곤 한다. 그런데 여행 중에 생리까지 겹쳤던 큰아이는 동강의 일이 악몽이었던지 그때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벌게져서 열변을 토한다. 아마도 제멋에 겨운 부모의 기억이 추억으로 윤색되는 걸 참을 수 없는 모양이라고 이제야 짐작해본다.
저승을 믿든 믿지 않든 확실한 사실 하나는 죽음에 이르러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돈도 명예도 물질도 심지어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을 얻기 위해 보냈던 수많은 순간들, 그 기억만을 가져갈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 '주마등'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 주마등 속에 누군가에게 참을 수 없는 기억은 없었으면 좋겠다.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아름다웠다' 자신할 수 있는 기억. 영화를 보고 나니 '추억'이란 그러한 기억의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싶었다. 추억을 간직한 삶. 그것이야말로 '원더풀 라이프'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