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는 일은 시간 여행을 하는 일이라고 종종 생각했다. 다섯 살... 열 살... 열두 살... 그 시절의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무시로 다가들던 시간. 아이들이 블록놀이를 하고,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좀 신이 났던 것도 같다. 그 힘들던 육아의 괴로움은 잊히고 아이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해본 적 없는 놀이를 하고, 접한 적 없는 책을 읽고, 지루하기만 했던 학교 공부를 아이들과 다시 해나가면서 새삼스럽고 설레는 날들을 보냈다.
어려서 접한 책은 전집이 다였다. 그때는 유독 전집류가 많았던 듯하다. 그것도 금박을 두른 두꺼운 양장본의 전집들. 읽을 것이 그 책들밖에 없었으므로 어린 나이에도 책장의 유리문을 옆으로 조심스럽게 밀고 그 책들을 꺼내 펼쳐 읽었다. 세계명작과 한국 단편문학은 세로줄이었고, 세계 아동문학은 가로줄이었다. 그때는 저자도 책의 위상도 알지 못한 채 끌리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키우며 만난 책들이 마냥 신기했다. 팝업북부터 시작해서 그림책, 만화책, 동화책, 잡지에 이르기까지 책들이 너무 다양해서 놀랐다. 어찌 보면 아이들보다 더 열광적으로 책에 빠졌던 듯하다. 그런 책들 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붙든 것은 그림책이었다.
처음 접한 그림책은 에릭 칼의 작품이었다. <배고픈 애벌레>, <울지 않는 귀뚜라미>, <아빠, 달님을 따 주세요>, <뒤죽박죽 카멜레온>. 출판사 영업사원에게 붙들려 구경한 그의 작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 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애벌레가 과일을 파먹고, 보름달이 책을 탈출했다. 무미건조한 활자에만 익숙하던 내게 에릭 칼의 작품은 신세계였다. 이후 다양한 그림책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에 남는 그림책은 작가를 기억하게 했다. 데이비드 위스너, 모니카 페트, 레오 리오니, 레이먼드 브릭스, 로렌 차일드, 앤서니 브라운, 에즈라 잭 키츠, 윌리엄 스타이그, 존 버닝햄, 패트리샤 폴라코, 피터 레이놀즈, 하이타니 겐지로와 같은 외국 작가나 권정생, 김재홍, 백희나, 윤석중, 이수지, 이호백 같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기억 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의 그림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아! 그림책은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구나,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을 미술서이자 철학서구나!
유년 시절, 나는 주로 백사장을 누볐다. 모래를 밟고, 모래를 뿌리며 놀던 날들. 그중에서도 하얀 모래밭에 찍혀 있던 갈매기의 발자국은 유난히도 기억에 생생하다. 젖은 모래 위에 선명하게 찍힌 그 발자국을 쫓아 종종거리던 기억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유년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다. 그리고 해변 앞 넓은 광장. 지금은 고층 빌딩이 즐비한 그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던 기억도 생생하다. 간혹 그 장면들을 떠올리면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싶어 위안이 된다.
지금은 아이들과 보낸 모든 시간에서 위안을 얻는다. 어둡고 축축했던 유년의 시간이 햇살을 받아 뽀송해지는 시간.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내게 그런 마법과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