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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un 22. 2021

고마웠어요, 에릭 칼

아이들을 키우며 처음 만난 그림책은 에릭 칼의 작품이었다. 서점도 아니고 놀이터에서 만난 그의 그림책은 이야기와 그림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전집을 선호하지 않음에도 덜컥 구매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었다. 그림책의 무엇이 그리도 좋았을까?


에릭 칼의 그림은 간결하면서도 입체적이다. 그 독특한 이미지가 종이를 오려 붙이는 '콜라주' 기법과 색의 대비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선명한 색감과 단순한 이미지, 그럼에도 풍부한 표현력. 그의 그림을 표현하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에릭 칼의 데뷔작은 1969년에 출간된 <배고픈 애벌레>.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이 책은 7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적으로 판매된 부수만도 5천5백만 부 이상이라고 한다. 이 작품 이전에 <갈색곰아 갈색곰아 무엇을 보고 있니?>라는 작품이 있지만 이 책은 빌 마틴 주니어의 글에 그림만 그린 것이어서 온전히 그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북극곰아 북극곰아 무슨 소리가 들리니?>, <판다야 판단야 무엇을 보고 있니?>도 마찬가지.


<배고픈 애벌레>는 알에서 갓 깨어난 애벌레가 일주일 동안 여러 음식을 먹고 나비가 된다는 이야기다. 어른에게는 단순하고 뻔한 이 이야기가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월, 화, 수, 목, 금, 매일 다른 과일을 하나씩 늘려가며 먹던 애벌레가 토요일에 과식을 하고 배탈이 났을 때는 안타까워하고, 일요일에 싱싱한 나뭇잎을 먹고 나았을 때는 손뼉을 쳤으니 말이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로 태어나던 순간에는 눈이 동그래졌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배고픈 애벌레>를 읽으며 낯선 과일 이름과 모양새, 그리고 사물을 세는 수의 개념에 눈을 뜨고 '변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에릭 칼의 그림책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배고픈 애벌레>를 통해서는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는 마침내 나비로 변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한동안 나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빠, 달을 따 주세요>를 통해서는 보름 동안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달의 모습을 신기해하며 한동안 달이 뜰 때마다 주인공을 흉내 내며 달을 따다 춤을 추기도 했다. <울지 않는 귀뚜라미>를 통해서는 귀뚜라미가 아무 때나 울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책을 닫았다 펼칠 때마다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를 반복해 들으며 즐거워했다. <뒤죽박죽 카멜레온>을 통해서는 자꾸만 다른 동물의 좋은 점만 부러워하다 결국 먹이를 잡지 못하게 된 카멜레온을 불쌍하게 여기기도 하고 마침내 제 모습으로 돌아온 카멜레온이 파리를 잡아먹을 때는 다행이라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집안을 물들이던 시절, 우리 곁에는 그림책이 있었다. 에릭 칼 선생은 그 시작점에 자리한 특별한 작가이다. 그의 근황을 살피다 지난 5월 23일 선생이 작고하신 걸 알게 되었다. 좋아했던 작가였는데도 얼굴을 이번에야 제대로 뵈었다. 인자하신 풍모. 꼭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다. 작업실에서 돌아가셨다니 끝까지 작품 활동을 하셨던 모양이다. 평생을 아이 마음으로 살다 가셨을 거라 미루어 짐작해본다. 편안히 영면하셨기를...  




에릭 칼은 1929년 미국 뉴욕주 시러큐스로 이주한 독일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이후 6살 되던 해에 다시 독일로 돌아갔는데 하필 이때의 독일은 나치 치하여서 아버지가 징용을 당했다. 다행히 에릭 칼은 징병을 피했지만 15살 때 독일-프랑스 국경에 있는 요새 ‘지크프리트선’의 참호 건설 작업에 동원되는 일을 겪었다. 그는 결국 1952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30대 후반에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경험이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줬다고 생전에 말했다. 그는 생전 자신의 누리집에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버지는 목초지를 가로질러 함께 숲 속을 걸었다. 돌을 들거나 나무껍질을 벗겨서 허둥지둥 도망가는 작은 생물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작은 생물의 생명 주기를 말해주고 조심스럽게 그 작은 생명체를 돌려보내곤 했다”고 적었다.   


<배고픈 애벌레>는 원래 책벌레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가 편집자 권유로 지금처럼 바꿨다고 한다. 에릭 칼은 1994년 <뉴욕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배고픈 애벌레>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든지 성장하고 날개를 펼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상원의원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선거 운동 때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칼은 1999년 문학상 ‘리자이나 메달’, 2003년 아동문학상 ‘로라 잉걸스 와일더상’을 받았다.



* 에릭 칼의 이력과 사진은 5월 27일 자 한겨레 신문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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