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빅셀은 스위스의 대표적인 현대작가이다. 국내에 알려진 저서로는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작품집이 있다. 내가 그를 각별하게 기억하는 것은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동명의 소설 때문이다. 이 작품을 처음 접했던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다만, '책상은 왜 책상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에 그의 작품이 답을 해주었다는 사실만 기억에 선명하다.
어려서부터 늘 궁금했다. 책상은 왜 책상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것일까. 책상을 장미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걸까? 장미는 연필이라고 부르면 왜 안 되는 걸까... 그 궁금증을 머리가 크기까지 내내 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질문을 한다는 것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연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물음에 누군가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가 더 컸던 듯하다. 그러다 어느 날 서점에서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제목의 책을 만났다. 눈이 동그래졌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질문에 답을 하는 책이 있다니!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나이가 많은 남자이다. 그는 어느 날 소리친다.
"언제나 똑같은 책상, 언제나 똑같은 의자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진이야. 그리고 나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하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지?"
그가 건네는 질문에 나도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냐고요.'
이야기 속 남자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탐색하지 않는다. 다만 책상을 더 이상 책상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에게는 책상을 왜 책상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달라져야만 한다'는 결심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지 않고 '양탄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침대는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제 그는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이면 이렇게 중얼거린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이후 남자는 세상의 단어를 자기 나름으로 새롭게 지어나간다. 남자는 이 일에 재미를 붙인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이름을 바꾸고 바뀐 이름을 암기한다.
남자는 결국 모든 단어를 새로 짓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원래의 명칭을 잊어버리고 만다. 새로운 이름을 익히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느라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단어를 찾고 기억해내야만 했다. 그 일은 무척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점점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결국 남자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 또한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고,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했고, 더 이상 인사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다."
책에는 책상을 왜 책상이라고 불러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이유도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던 답을 책을 읽고는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대체로 '현대인의 소외와 상실'을 다룬 것으로 평가받지만 내게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한 작품으로 인상 깊게 각인되었다.
책상을 책상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흔히 '언어의 사회성'이라 불리는 그것이 책상은 장미도 아니고 연필도 아니라 책상인 이유의 전부였다. '언어의 사회성'에 대해 인식하게 된 이후 이름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생각을 약속한 이름으로 말하는 것, 그것이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 말이다.
피터 빅셀 이후로 언어와 관련해 각별히 기억되는 작가로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꼽을 수 있겠다. 그의 영화평론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동명의 글을 읽다가 다음 문장을 읽고 피터 빅셀의 소설만큼이나 감명을 받았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문장을 접하고 글을 쓸 때마다 곱씹는다. 나의 글은 근사한가? 언어의 사회성을 담보로,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