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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ul 31. 2021

에어 프라이기가 내게로 왔다

집안일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밥을 짓는 일이다. 장을 보고 식자재를 다듬고 씻고 조리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좋아지지 않는 일이다. 끼니때마다 싹싹 비워내는 그릇들을 보면 만들 때의 힘겨움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다시 밥때가 돌아오면 무얼 차려내야 하나 고민이 앞선다. 


이런 고민은 시골 텃밭에서 가져오는 수확물 한 톨 없고 한 달에 천 페이지에 달하는 표준서를 읽어내야 하는 겨울이면 더하다. 여름에는 그나마 온갖 채소 덕분에 장을 보지 않고도 일주일을 버틸 만하다. 하지만 겨울에는 마트에서 장을 보지 않고는 밥상을 차릴 재간이 없다. 특히 코로나가 발생한 이후로는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는 식구가 남편 말고도 한둘은 늘 있어 이삼일이면 냉장고가 텅텅 빈다. 그러다 보니 지난겨울에는 김훈의 산문 <밥벌이의 지겨움>이 밥을 지을 때마다 떠올랐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작가 김훈은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의 고역에 대해 토로한 것지만 밥 짓는 일이 괴로운 주부 입장에서는 그의 글이 영락없이 '밥 짓기의 지겨움'으로만 읽혔다.  




음식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삼시 세끼를 굳이 끓이고, 삶고, 찌고, 볶고, 무치며 살았다. 집밥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도 있지만 기름기를 싫어하고 육류를 즐기지 않는 남편의 영향이 컸다. 아이들은 볶음밥이나 파스타 같은 단품요리도 뚝딱 그릇을 비워내지만 남편은 국이나 찌개, 생선, 나물류가 아니고는 손을 대지 않는다. 소화력이 약한 때문이기도 하고 시골밥상을 먹고 자라 그렇기도 하다. 덕분에 온 식구가 건강한 밥상을 누리기는 했다. 하지만 오십이 넘어서면서는 입맛 다른 장정 넷의 먹거리를 책임진다는 일이 여간 힘에 부치지 않는다. 그래서 힘든 내색을 하며 식구가 다섯이니 순번제로 밥을 짓자는 꾀를 내었다. 하지만  요리를 손에 익히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크램블 에그나 샌드위치,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국수를 몇 번 말아내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날 큰아이가 에어 프라이기(7.7L)를 가지고 들어왔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에어 프라이기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부엌이 비좁은 탓도 있지만 오븐의 훈풍 기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써 보니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용기가 서랍형이어서 사용이 간편하고 세척이 쉽다. 게다가 기름종이를 깔고 조리하는 경우에는 뒤처리할 것도 없다. 에어 프라이기가 생긴 이후 밥 짓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수확의 계절이어서 야채가 넘쳐나서이기도 하고 밥 짓는 지겨움을 내색한 이후 수확물을 꼼꼼히 다듬어 오는 남편의 수고 덕이기도 하다.


에어 프라이기를 이용해 주로 만드는 요리는 볶음류이다. 가지, 마늘, 양파, 호박, 방울토마토 등 남편이 다듬어온 각종 야채는 씻은 후 한 입 크기로 잘라 비닐봉지에 넣고 소금과 올리브유를 조금 뿌려 흔들어 섞는다. 이후 기름종이를 깐 에어 프라이기에 넣고 180도에서 10분만 조리하면 프라이팬에 볶던 것보다 기름은 반으로 줄고 아삭한 식감은 배로 늘어난 야채볶음을 즐길 수 있다. 그뿐인가. 생선도 기름종이를 깔고 180도에서 20분이면 비린내 하나 풍기지 않고 식탁에 올릴 수 있고, 각종 고기류도 손쉽게 구워낼 수 있다. 불 근처에 가지 않아도 근사한 요리가 20분 만에 식탁 위에 오를 때면 마법봉을 휘두른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간식을 만들기도 너무 쉽다. 감자를 채 썰어 물에 담가 몇 번 헹구고 채에 받쳐 물기를 빼고 소금과 포도씨유로 적당히 버무린 후 200도에서 20분(중간에 한 번 뒤섞는다.)이면 기름 팬을 사용하지 않고도 맛있는 감자튀김이 완성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군만두나 너깃류도 기름 한 방울 두르지 않고 맛나게 구워낼 수 있다.   


냉장고와 세탁기의 발명이 가사노동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어서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게는 에어 프라이기가 그렇듯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에어 프라이기가 생긴 이후 밥 짓는 지겨움이 많이 사라졌다. 여전히 찌개나 국을 끓여야 하고 나물은 무쳐야 하지만 불 앞에서 볶고 굽고 찌는 일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지겨움은 한결 가볍다. 밥 짓는 일이 그토록 지겨웠던 이유에는 시간과 노력이 그 어떤 집안일보다 많이 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에어 프라이기 사용 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하루 한 끼, 많게는 세끼 전부를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다. 정겨운 풍경이지만 밥상을 차리는 입장에서는 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밥 짓기를 이어나가는 것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건강한 식단을 차릴 수 있는 방법이 집밥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주부 27년 차. 문득 2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상을 차려낸 일들이 신기하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그 일들을 그래도 꾸역꾸역 날마다 해냈구나 생각하면 스스로가 좀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래서 불가에서는 살림살이를 수행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무언가 성취해 낸 이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가족을 위해 좋아하지도 성취로 연결되지도 않는 일들을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끝끝내 해낸 이들이 대단해 보인다. 그들의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인류가 존속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밥벌이의 지겨움과 밥 짓기의 지겨움에도 여전히 그 일을 해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뜨거운 박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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