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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Mar 31. 2023

낙엽 같은 마음

 

가까이 살면서도 챙겨줄 것이 있어야 들르는 막내형님이 며칠 전 요구르트를 사 들고 집을 찾았다. 어쩐 일인가 했더니 올케의 생일 즈음이라 일부러 찾은 걸음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탁상 달력의 생일 메모를 보고는 생일날 별일 있냐 물었다. 별일 없다 했더니 형님은 조치원 언니네로 나들이를 가자고 말했다. 그래도 세종시에 가보고 싶던 차여서 반색을 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나들이 계획이 짜였다.


막내형님은 시집 식구 중에서도 좀 각별한 어른이다. 형님네 아이들이 결혼식에서 화동을 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른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아본 경험이 적은 내게 언제나 한결같은 애정을 보내준 어른이기 때문이다. 시집에 그런 어른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아마도 막내형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결코 무난한 올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조치원역에 도착하니 셋째 형님이 차를 끌고 마중을 나와 계셨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고모부님이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홀로 된 셋째 형님은 성격이 활달하고 재주가 많아 홀몸임에도 일정이 바쁜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송해하는 내게 셋째 형님은 찾아줘서 오히려 고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셋째 형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매운탕을 뒤로하고 올케가 좋아하는 산채비빔밥 집으로 차를 몰았다.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길가에 만개한 벚꽃을 보며 시어머니와의 첫나들이가 떠올랐다. 결혼을 하고 서울을 찾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처음 갔던 나들이 장소는 롯데월드였다.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에게 롯데월드라니. 딴에는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며 모시고 갔던 것인데 나이가 들수록 자그마한 체구에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부지런히 아들네를 쫓아다녔을 시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민망하기 그지없다.


둘째를 낳고 백일만에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마치 당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 친정어머니가 전하는 '아들'이라는 말에 '정말이냐?'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시다 끝내 울음을 터트리셨다는 시어머니. 그때는 그 눈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눈물이 이해되지 않은 탓에 첫째에 비해 턱없이 홀대하며 둘째를 키웠다. 시어머니가 보였던 유별난 아들 사랑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시간이었다.  


시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사회적 관계 외에는 그 어떤 관계도 용납하지 않았던 두 여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알아봐 주지 않는 '시집'이 야속할 뿐 단 한 번도 시어머니를 인간으로 궁금해하지 않았던 서른두 살의 한 여자가 떠오른다. 어떤 딸이었는지, 자라면서 어떤 서러움이 있었는지, 어떤 기쁨이 있었는지, 꿈은 무엇이었는지, 시아버지를 어떻게 만났는지, 어떨 때 그분을 사랑하고 미워했는지 그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시간들이 떠오른다. 3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으로 다가서기에 그리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며느리'라는 갑옷을 벗어던졌더라면 말이다.  


식사 후 셋째 형님은 계룡산 쪽으로 차를 몰았다. 평일인데도 계룡산으로 향하는 차가 꽤 많았다. 국립공원 초입에 이르러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벌써 벚꽃이 만발했다. 조치원에 핀 벚꽃에 감탄을 연발했던 막내형님과 나는 계룡산 국립공원 초입에 만개한 벚꽃을 보며 그야말로 탄성을 질렀다. 고목의 검은 몸피와 어우러진 벚꽃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축하 화환을 받아 든 기분이었다. 막내형님과 나의 감탄은 이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금강보행교에서도 세종청사 옥상정원에서도 호수공원에서도 그칠 줄 몰랐다. 아낌없이 탄성을 내지르기 위해 계절마다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 하루였다.


갑작스러운 나들이였지만 어느 생일보다도 감사하고 충만한 하루였다. 아름다운 화한과 맛있는 밥상, 그리고 조카에게서 건네받은 책 선물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느새 시집과의 인연도 김사인 시인의 '조용한 일'처럼 편안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김사인, 「조용한 일  전문)


아름다운 관계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낙엽처럼 그냥 말없이 곁에 머물러주는 시간 속에서 나고 자란다. 이 봄, 앞으로 맺어질 수많은 인연을 떠올리며 낙엽 같은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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