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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Feb 06. 2024

복수에서 구원으로

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황기라의 「안나의 방」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쾌청한 하늘과 쨍한 햇볕. 그 아래 운동장에 일렬로 늘어선 여학생들. 그 사이를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슬슬 걸어 다니는 선생님의 발걸음. 폭력은 느닷없었다. 그 아이의 위치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던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이는 뺨을 맞았고 선생의 드센 위력에 휘청거리다 넘어졌다. 하지만 선생은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넘어진 아이에게 발길질을 했다. 아이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고 그럼에도 선생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어떠한 말도 어떠한 동작도 하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 모두가 그렇게 지켜만 보았다. 고개를 떨군 채.


그 시간 '비겁'과 마주했다. 아니, 느꼈다. 나는 비겁하구나. 때때로 남자들이 교련선생에게 당했던 폭력담을 떠벌일 때면 나는 그때 운동장에 쓰러져 교련선생의 발길질을 견디던 그 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며 느꼈던 날 것 그대로의 '비겁'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누군가는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최루탄 아래에 쓰러지고 누군가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구석 빚진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은 그런 '비겁'의 한 자락을 모두가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 느꼈던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떠오르게 하는 단편소설을 읽었다. 안나의 방. 올해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소설은 성인이 되어 시설을 나와 세상에 던져진 한 여자, 안나의 이야기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는 어느 신혼부부의 이야긴가 했다. 첫 문장이 "정래는 토요일 새벽 안나에게 청혼을 해왔다."라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신혼부부의 이야기도, 그렇다고 연애담도 아니었다. 아니, 연애담일 수도 있겠다. 부모의 죽음으로 자신의 방을 잃어버린 어린 안나가 어떻게 누군가의 방에 깃들고, 쫓겨났으며, 마침내 스스로 마련한 한 칸의 방에 누군가를 깃들게 할 마음을 내어 보는지를 그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쉽게 연애담이라고 규정하기에는 안나의 지난한 청춘이 너무 선명하고 아프다. 그녀가 겪은 폭력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눈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 아픔 때문에 소설은 연애담이라기보다는 성장담으로 읽힌다. 작가가 당선소감[[2024 신춘문예] 물러날 수 없는 진짜를 향한 나와의 싸움 - 매일신문 (imaeil.com) 참조]에서 밝힌 요리사 바베트의 의연한 태도를 안나가 마침내 획득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나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응집되지 못하고 흩어져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안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시가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갑자기 안나에게로 왔고 그래서 마음은 물러질 대로 물러져 있었다. 더 물러지기 전에 실행하려고 왔지만 이미 늦어버렸음을 식탁에 놓인 칼끝, 그 궁극의 점 앞에서 알았다. 시와 칼은 양립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는 버려야만 했다. 자신은 그 차갑고 단단한 칼끝을 배에 찔러 넣을 수 없었다. 안나는 두려웠고 아름다움을 좇고 싶었고 어찌됐건 살고 싶었다. 서서히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복수를 결심하고 찾았던 숙부의 집에서 안나가 자신의 변화를 깨닫고 돌아 나오는 장면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복수의 방을 나와 구원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안나. 이 대목을 읽으며 작가의 역량에 무한 신뢰가 생겼다. 황기라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검은 눈물 같은 시선과 시린 파도 같은 어조. 심사위원들은 작가가 지닌 소설가로서의 결에 대해 그렇게 표현했다[[2024 신춘문예] 검은 눈물같은 시선과 시린 파도 같은 어조가 돋보인 `안나의 방` - 매일신문 (imaeil.com) 참조]. 그 시선과 어조를 오래도록 보고 싶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2024 신춘문예 당선작] 안나의 방 - 매일신문 (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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