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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Feb 23. 2024

동서의 봄

지난 주말, 동서와 함께 코엑스를 방문했다. 동서가 보고 싶어 하는 전시가 있어서였다. 전시명은 '월드아트엑스포'. 국내 화랑들이 소유한 그림을 둘러보고 구매할 수 있는 전시였는데 우리가 그곳을 찾은 이유는 그림 재테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출품된 캘리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이후 동서는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처음은 재봉이었다. 그다음은 퀼트, 그다음은 종이공예, 그다음은 세밀화, 그다음은 수채화. 그러다 요즘은 캘리에 빠졌다. 우리 집에서 "글씨 하나 피었네"라는 강병인의 책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동서는 강병인의 캘리를 보고 무척 놀라워했다. 글씨가 꽃처럼 피어나다니. 내가 느꼈던 놀라움을 동서 역시 똑같이 느꼈다.  

캘리그래퍼 강병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8년 전 어느 잡지에서였다. 잡지를 읽다 '봄'이라는 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봄'이라는 글씨에서 땅을 박차고 돋아나는 새싹의 생동감을 여지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글씨를 이렇게 쓸 수도 있다니! 강병인이라는 이름 석 자와 캘리그래피라는 예술에 눈 뜨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웃자'. '웃자'라는 글씨를 보고는 허허 웃음이 났다. 두 팔 벌려 뛰어가는 '웃'.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자'. 의지보다 중요한 건 행동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웃자'를 잡지에서 오려내었다. 그러고는 액자에 넣어 현관 옆 벽에 걸었다. 이후 이 액자는 이사를 다녀도 현관에서 내려오지 않는 유일한 액자가 되었다. 


강병인의 글씨를 접하고 팬에 머문 나와 달리 동서는 강병인의 글씨를 접한 이후 마음에 캘리를 담아 두었다. 2년 전, 동서는 본격적으로 캘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몰입은 언제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준다. 동서는 배운 지 1년도 되지 않아 성당 주보에 주기적으로 글씨를 올릴 정도로 실력이 늘었고 얼마 전에는 공모전에서 입선을 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전시회에는 생각보다 캘리가 많지 않았다. 아쉬웠다. 하지만 전시회를 방문한 것이 영 헛되지는 않았다. 몇몇 캘리에서 좋은 문구를 발견하고 동서가 문구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서는 그동안 캘리 문구의 대부분을 성경 구절에서 가져왔다. 물론 주보에 글씨를 싣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깊어진 신심이 한몫했다. 신자 입장에서는 성경 구절만큼 좋은 문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 문구는 아무래도 일반인에게까지 감흥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동서는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며 좋은 문장이 주는 힘에 새삼 눈을 떴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동서와 카페에 마주 앉았다. 동서는 며칠 전 쓴 작품이라며 핸드폰을 열어 글씨 하나를 보여주었다. '봄'이었다. 글씨는 강병인의 '봄'을 많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동서의 '봄'이었다. 동서는 생각대로 글씨가 써지지 않아 며칠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적잖은 흥분이 동서에게서 느껴졌다.  


나는 '봄' 곁에 자리한 문구를 바라보았다. 김은숙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애신이 유진에게 썼던 편지글이다. 


"봄을 핑계 삼아 안부를 묻소. 나는 잘 있소. 귀하는 잘 있소?"


이런 문장을 고르다니. '봄'과 함께 어우러진 문장을 보며 동서의 심미안에 놀라고 말았다. 글씨와 그림, 그리고 문구의 어우러짐이 더없이 보기 좋았다.    


동서는 오랫동안 이런저런 배움에 몸 담으며 자신의 끈기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와 보니 그 의심은  자신에게 맞는 것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탐색하는 여정이었다. 캘리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동서는 더없이 편안하고 단단해 보였다. 


동서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에게는 끊임없는 정진이, 누군가에게는 끊임없는 탐색이 약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중요한 건 정진이든 탐색이든 멈추지 않고 하는 것. 쌀을 씻고 불려 솥에 안친 다음 불을 켜면 밥이 지어지듯 행함이 있는 곳엔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빚어지게 마련이지 않은가. 


이 겨울, 동서의 봄이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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