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에게 이유를 묻는다면

독서

by 기묭




나는 '그냥'이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약간의 회의감을 품기도 하지만 그럼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명확할까 하는 반발심이 드는 것 또한 내 마음. 좋아서 하는데 이유가 있겠냐 싶다가도 두루뭉술 뭉뚱그려다 넘겨짚어 버리면 너무 가벼워지는 건 또 아닐까 싶기도 한 것이 또 그 내 마음. 읽는 속도에 비해 쌓여만 가는 새 책들을 보고, 약속 시간보다 몇 시간 일찍 나와 카페에서 부런치를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친구가 묻는다. 그리고 나는 친구의 물음을 그냥 묻어버렸다가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 다시 들어내다가 나에게 내가 되묻는다.





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스스로 결정하는 삶이다 - 페터 비에리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저자라는 사실만으로 집어 들었다. 유럽 문화의 수도인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2011년에 열린 3일간의 강연을 토대로 집필된 이 책은 강연 순서에 따라 자기 결정의 삶이 무엇인지, 자기 결정을 위한 전제가 되는 자기 인식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 쉽고 친근하게 이야기한다(라고 도서출판 은행나무 웹사이트에 쓰여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선 할 말이 많아졌다. 그래도 말로 명료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마냥 '그냥'이라고 답하진 않게 될 것 같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래서 한다. 그럼 어떻게?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는 행위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걸까. 애초에 자기 결정의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외부의 어떠한 위협이나 간섭에서 벗어난 삶을 우리는 꿈꾼다.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자기 뜻대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이기적인 마음과는 다르다고. 형식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으나 규범이라는 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규범은 사회적 정체성을 규정짓는 역할을 하는데 규범이라는 틀이 없다면 존엄성과 행복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규범의 틀 안에서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삶, 그리고 어떤 규범을 용인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는 삶을 꿈꾸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어떻게 해야 생기는 것일까. 누군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이미 이전에 수많은 일을 겪었고 수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았다면 그 누군가가 과연 이러한 영향력에서 벗어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기 결정이란 것은 결국 말뿐인 허울이 아닐까? 계속되는 반문. 매 순간 과거가 드리우는 그림자와 외부의 영향이 미치는 자기장 안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기 결정권을 운운할 수 있는가. 결국 자기기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왜?

그 누군가의 내면세계가 외부와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 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이라고.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삶의 작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무대가 아닌(아니, 무대이면서 - 인가?).


듣다 보니 무언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느낌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자기 결정력을 습득하는 데에 어떤 것들이 도움이 될까. 무엇을 해야 할까. 혼자서 어떻게 하라고. 그러나 사실(짜잔)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_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문학이 있습니다. 문학은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요? 읽기와 쓰기가 자기 결정력을 습득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문학작품을 읽으면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립니다. 인간이 삶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을 읽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 이제 상상력의 반경이 보다 넓어진 것입니다. 이제 더 다양한 삶의 흐름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직업과 사회적 정체성, 인간관계의 다양한 종류를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삶의 내적 관점에 대해서도 우리의 공감능력이 성장합니다. 우리는 정신적 정체성의 성공과 실패, 발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결정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패하면 어떻게 해서 실패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지요.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는 것은 자기 결정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문하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질문의 답은 오직 여유로운 가능성의 장 안에서 여러 가지로 입장을 바꿔보는 정신적 활동을 할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자기 결정에 있어서 자아상의 서술적 구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았습니다. 문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법입니다. 내외적 에피소드에 관한 짧은 글들은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좀 더 길고 복잡하게 서술하는 것은 긴 호흡과 하나의 구조가 필요하기에 그보다 더 어렵습니다. 문학이, 아니 오직 문학만이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절정을 향한 드라마적 전개이며 이 부분이 자아상의 핵심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친구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왠지 친구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독서보다 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고?


_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명확한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독서보다 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이야기를 직접 쓰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무의식의 판타지라는 깊은 기저에서 온 것일 때라야만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 큰 매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내적 검열의 경계를 느슨히 하고 평소라면 무언의 어둠 속에서부터 경험을 물들이던 것을 언어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거대한 내적 변화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소설 한 편을 써본 적은 없지만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에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받긴 하는데 모호하다.


_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언어와의 관계가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경험을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일입니다. 그중에는 자신만의 목소리, 자신만의 선율을 찾으려는 시도도 포함되고요. 문학적 글쓰기는 말에게 그것이 가진 원래의 의미와 시적 힘을 되돌려주려는 노력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다시 한번 새롭게 습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말이 자신에게 맞거나 맞지 않는가 하는 물음과 지속적으로 부딪히게 되지요. 이것은 개별적 단어 하나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문장의 리듬과 단락 전체, 즉 말의 음악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집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쓴 글이 어떤 울림을 가지는지 알아내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 울림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순수한지 아니면 냉소적인지, 얼마나 감상적인지, 실망스러운지 아니면 분노해 있는지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서 뭔가를 발견하는, 그냥 그뿐으로 그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는 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친구여,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요. 오묘하다. '그냥'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곤 했는데 그게 자기 결정력을 습득하는 과정이었다니. 사실은 정말 '그냥'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하다. 그냥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들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집어 들었던 것처럼. 그냥 같은 저자라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처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친근해서 그냥 하게 되는 것들이 독서와 글쓰기라는 게 참 다행이다.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면 형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나도 책 좀 읽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책 읽는 취미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습관을 들이기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말하며 형은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인터넷 방송을 시청한다. 나도 자주 시청한다. 유튜브도 많이 보고 시간이 많이 주어지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왓챠 플레이로 영화를 본다. 사실 영상매체가 더 끌리고 재미있다. 밤을 지새워서도 볼 수 있다. 책은 그렇지 못한 편이다. 그런데 나는 왜 계속 책을 읽는 걸까. 관성일까. 근데 막상 읽으면 재밌는데. 고민을 잠깐 해보지만 대답은 페터 비에리 아저씨가 해주셨으니 나는 그냥 계속 읽고 쓰련다. 무슨 대답이 필요할까. 그냥 하는 건데. 그리고 그냥 하는 것이 삶에 본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무슨 말이 필요할까. 왜 하냐고? 난 이걸 그냥 하는데 너는 그러지 못하는구나. 이거 괜찮은데 아쉽네. 나만 해서 미안한 마음마저 드는 걸. 왜 책을 읽고 글을 쓰냐고? 나는 되묻고 싶다. 왜 책을 안 읽어? 왜 글을 안 써? 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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