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섭은 16번 탑승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에서 방금 산 물을 꺼내 마시고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비행기 표를 꺼냈다. 출발시간은 8시 50분이었고 탑승시간은 8시 35분이었다. 탑승까지는 5분가량이 남아있었다. 용섭은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꺼내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끼워 넣고 형에게 이제 곧 탈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2분 정도 남자 사람들이 한 둘씩 일어나 줄을 서기 시작했다. 용섭도 줄을 서기 위해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용섭이 줄을 서자 탑승을 시작하겠다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직원은 고개를 숙이고 잘 모시겠다는지 무슨 말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말을 했고 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용섭은 통로가 연결되어 있어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용섭의 자리는 26K, 오른쪽 날개가 보이는 창가였다. 자리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용섭은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던 에코백과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짐칸에 올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창가 쪽이라 일어나 자리를 비켜줄 일이 없을 테니 용섭은 코트를 벗고 바로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연인인 S에게 보낸 도착 하면 연락하겠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용섭은 책을 펼쳤다. 남은 페이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비행 중에 다 읽을 심산이었다. 아직 승객들은 타고 있었다. 뒤늦게 용섭의 왼쪽의 왼쪽 자리에 승객이 한 명 앉았다.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에 가죽재킷을 입고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비행기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고 용섭은 바로 옆자리가 빈자리라는 것에 다시 기분이 좋았다. 용섭은 다시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단서가 필요했다. 빈자리는 좋은 단서가 되었다. 용섭은 편히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경애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오른쪽 페이지를 다 읽고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비행기 안의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진 채로 비행기는 천천히 활주로로 들어섰다. 책을 손에 쥔 채로 용섭은 생각했다. 저녁 비행기는 원래 불을 끈 채로 갔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용섭은 자기 자리의 등을 켤까 싶다가 자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등 대신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몇 페이지 남지 않았기에 불편해도 감수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휴대폰 플래시의 불빛도 강해서 용섭은 그냥 책을 덮고 잠을 청해야 하는지 망설였다. 용섭이 휴대폰 플래시를 켠 채로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등이 켜졌다. 용섭은 왼쪽을 돌아봤다. 용섭의 왼쪽의 왼쪽에 앉아있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오른손을 위로 가리키고 있었다. 용섭은 등을 어떻게 켜는지 알고는 있었다고 다만 주변에 눈치가 보여서 그렇다고 속에서 여러 말들이 오갔지만 무어라 말은 못 하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어색한 미소를 왼쪽 방향으로 보내기만 했다. 용섭은 휴대폰 플래시를 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등을 켠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고민하고 망설였던 것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당연한 권리인데도 왜 그렇게 눈치를 봤을까 싶어 다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배려심이 남달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스스로를 감싸주기에는 디테일한 부분만 다를 뿐 비슷한 형식을 갖춘 과거 일련의 사건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기 때문에 용섭은 너무 많아 모두 감싸 안을 수 없었다. 아직은 그랬다. 결국 이것도 연장선상에 놓여있구나. 용섭은 파고들기 시작했다. 파고들면서도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주의를 돌릴 것이 필요했다. 용섭은 자신의 자리에 등을 켜준 남자가 퍽이나 상냥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네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에 가죽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상냥하면 안 되는 건가 싶어 멈췄다. 용섭은 아주 잠깐 스쳐간 생각이기에 괜찮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겉모습을 보고 스스로 의식할 새도 없이 잠깐 스쳐간 생각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여겨도 되지 않느냐 라며 용섭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주의를 돌리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용섭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에 다시 주의를 뺏기다가 기분이 좋다가 다시 안 좋다가 안 좋다가 다시 좋다가 다시 주의를 뺏어와 책을 읽다가 비행기 안의 불이 켜졌다. 이륙하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 불이 켜졌다. 용섭은 머리 위의 등을 껐다. 조금 웃음이 나왔다. 용섭은 다시 책에 집중했다. 몇 페이지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끝내 다 읽지는 못했다. 비행기가 땅에 닿자마자 용섭은 비행기 모드를 끄고 형에게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비행기가 멈추고 사람들이 일어나 줄을 섰다. 용섭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항상 마지막에 내리곤 했다. 이번에도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용섭은 몇 사람 남지 않았을 때에야 일어나 가방을 꺼냈다. 코트를 입고 가방을 등에 메고 에코백을 오른쪽 어깨에 멨다. 용섭은 뒤를 보며 옷을 여미고 있었는데 멀리서 승무원이 짐칸에 남은 짐이 없는지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승무원은 발을 세워 짐칸을 올려다보다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지 통로 양옆 의자 팔걸이를 받침대 삼아 올라가 짐칸을 수색했다. 양발을 의자 팔걸이에 올린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용섭은 왜인지 모르게 그 모습이 퍽이나 유연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 생각은 용섭을 다시 기분 좋게 했는데 승무원이 직원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용섭은 생각했다. 승무원들의 친절한 인사를 어색하게 맞받으며 용섭은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에 다다르자 통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용섭은 통로가 연결되어 있어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용섭은 연달아 기분이 좋게 된 것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결국엔 기분 좋은 마음으로 용섭은 집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