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 계약

by 기묭


사람은 편한 길로 가려는 습성이 있다 그랬지. 그게 자신이 원하는 길과 멀어지는 길이라 하더라도 말야. 이 같은 말이 내겐 진리와도 같이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기본 전제로 깔아 두고 나 자신과 합의를 보려 한다. 나는 이 습성을 전제로 나와 오디세우스 계약을 할 것이다.



오디세우스 계약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귀향하던 중 자신의 배가 곧 세이렌들이 사는 섬을 지나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세이렌들은 감미로운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의 넋을 빼놓는 걸로 유명했는데 문제는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가가다 바위에 부딪혀 난파를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들의 노래가 듣고 싶었다 매우. 그러나 자신과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당근. 오디세우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본인들의 귀를 막을 것을 지시했다. 오디세우스의 배는 세이렌들이 사는 섬으로 향했다. 세이렌들이 사는 섬을 지나면서 오디세우스는 노래에 매혹이 되어 세이렌들을 향해 배의 방향을 바꾸라고 애원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부하들은 듣지 못하고 묵묵히 노를 저었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세이렌들의 노래를 듣고도 무사히 섬을 지날 수 있었다. 이렇듯 현재의 자아와 미래의 자아가 일종의 합의를 하는 것을 '오디세우스 계약'이라고 한다. 그렇게 미래의 내가 마주하게 될 환경을 지금의 내가 미리 조성해보자는 것이다.




나의 세이렌에게


lte 100기가에 데이터가 무제한인 요금제를 사용하면서 스마트폰 사용을 줄여 보겠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많이. 요금제를 줄였다가 늘렸다가 조정을 자주 하다 지금은 알맞은 요금제를 찾았다 겨우. 필요는 하되 과하지는 않게. 내가 나에게 제한을 두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요금제로 바꿨다.

때는 2017년 7월, 나는 고향인 제주도의 전원주택에서 노량진의 고시원으로 옮겨왔다. 고시원 생활은 굉장히 폐쇄적이었는데 무엇보다도 방음이 안된다는 점이 사람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노래를 듣든 영화를 보든 무조건 이어폰을 끼고 있어야 했다. 나는 잘 때 항상 무언가를 틀어두고 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혼자 있을 땐 그런 경향이 더욱 짙었다. 대학생 때는 무한도전을 틀어두고 잤고 군대에서는 팟캐스트를 틀어두고 잤다. 고시원에 살던 당시엔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틀어두고 잤는데 방음에 신경이 쓰여 어쩔 수 없이 이어폰을 낀 채로 자야 했다. 그렇게 나는 이어폰을 낀 채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처음에는 방음 때문이었으나 나중에는 외로움이 싫어, 침묵, 고요가 견디기 힘들어 차고 다녔다. 귓가에서 누군가(사람이) 떠들고 있어야 마음 편히 생활할 수 있었기에 이어폰은 당시 나에게 새로운 기관이었다. 나는 화장실을 갈 때도 이어폰을 낀 채로 갔다. 머리를 감을 때는 감고 나서 바로 착용할 수 있도록 목에다 걸쳐 두었고 샤워를 할 때는 창가에 걸쳐두고 소리를 최대로 키워 이어폰 너머로 간간히 들리도록 해 둔 채 샤워를 했다. 나는 그런 상태로 고시원에서 5개월을 지냈다. 더 이상은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살다간 내가 무엇이 될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되겠지만. 아니, 선택의 여지없이 무엇이 주어지겠지. 그게 무엇이든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겠지.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내겐 폐쇄적인 환경이 아닌 더 나은 환경이 필요했다. 적어도 창문이라도 달려있어야 했다.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급히 원룸을 구해 신림으로 이사를 갔다.

원룸에 가서는 방음에 신경을 덜 써도 되어서 이어폰을 낀 채 생활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러나 이어폰을 끼고 말고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하루 종일 무언가를 재생하고 있었다. 내가 보든 안보든 귀를 기울이든 말든 나의 방은 소리로 채워져야 했다. 그래야 나는 외롭지 않았으니까.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했으니까. 나의 소음에 대한 욕구, 연결에 대한 욕구는 갈수록 커져갔고 나는 완전하게 소음 없인 잠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구하면 얻는다. 나는 많이 외로웠지만 사람을 사귀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으니까. 귀찮음과 별개로 연결에 대한 갈망은 갈수록 커져갔다. 나는 구했다 그리고 얻었다. 과거에 나는 과거에 형이 침대에 누워 인터넷 방송을 보고 있을 때마다 무슨 재미가 있어 그렇게 낄낄거리며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속으로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웬걸, 나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연결에 대한 갈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방송이 끝나도 다른 누군가의 방송이 있다. 채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연결될 수 있었다. 한창 재밌게 보던 때의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만족해 버린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만족감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다른 게 필요하지 않았다. 최저임금 받으면서 적당히 벌고 집에서 혼자 인터넷 방송 보고 혼자 야동보고 자위를 하면서 사는 게 너무 행복한 삶일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더 이상 어떤 꿈이나 목표가 필요하지 않았다. 중독성이 아주 강했다. 보던 스트리머(방송하는 사람)가 질리면 다른 스트리머 방송을 보면 다. 30~40명 정도를 팔로잉했고 알림이 올 때마다 들어가서 재밌는 콘텐츠면 보고 아니면 다른 방송으로 옮겨가고 가끔은 돈을 내고 구독을 했다. 인터넷 방송을 보게 된 이후로 티비는 볼 수 없었다. 흥미없어서. 인터넷 방송이 더 자극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방송과 내가 매우 가까웠으니까. 꾸준히 보다 보니 방송 방송마다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였고 기억은 쌓여서 추억이 됐고 나는 어느 순간 우리에 속했고 우리끼리의 은어들이 생겨났고 유대감이 자랐고 나는 더욱 몰입하게 되었으니까. 과몰입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이 몰입했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바랄 게 없어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꿈에 대한 갈망은 가끔씩 쓰는 글이나 가끔씩 그리는 그림으로 덮을 수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꿈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라고 나를 설득하면서. 멈춘 채로 움직이던 시기였다고 나는 회상한다.





최저임금 받으면서 적당히 벌고 집에서 혼자 인터넷 방송 보고 혼자 야동보고 자위를 하면서 사는 삶은 혼자가 아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나 혼자 꾸던 꿈에 누군가가 난입했고 나는 놀라 허둥지둥 야단법석을 떨다가 안정이 되었다 겨우. 안정이 되고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삶이었지만 변하고 싶었다. 달라지고 싶었고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다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에너지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곳저곳에 많이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도가 있다. 나의 카드에만 한도가 있는 게 아니다. 알게 모르게 나는 많은 곳에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하는지 나는 나를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 귀를 기울여야 했다. 소음을 줄여야 했다. 연결에 대한 갈망이 해소되면서 소음에의 의존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나는 이미 태엽인형이었다. 태엽은 나도 모르게 감겨있었고 나는 의도 없이 행위했다. 의도 없이 무언가를 재생했고 의도 없이 들었다. 휴대폰을 보면서 또는 들으면서 또는 보고 들으면서 거리를 걸었고 나는 언제나 겸손히 고개를 숙였다. 신호등이 켜지든 말든 차가 오든 말든 나는 언제나 겸손했다. 서울에서 맑은 하늘을 보기가 어렵다는데 애초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겠노라, 세상의 소리에 나에게 귀를 기울이겠노라 다짐했다. 그런 다짐과 흩어짐 사이에서 세 개의 이어폰이 망가졌다. 다지는 사이에 찢어버렸다가 흩어지는 사이에 다시 구입했다. 요금제를 낮췄다가 높였다가. 어플을 지웠다가 깔았다가. 나는 안 되는구나 싶던 와중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나 보다. 이리저리 발버둥 치며 진흙탕 싸움을 하다 보니 흥미가 많이 가셨다. 시행착오 끝에 나는 나 자신과 어느 정도의 합의를 이루었다. 단순히 안돼! 가 아니라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끔. 절대 안 보고는 못 살 거라고 안 듣고는 못 살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잘 살더라. 그래도 욕구는 남아있다. 무슨 욕구라고 해야 할까. 뭐가 많긴 한데 드러나는 수단은 언제나 휴대폰이다. 그렇다고 휴대폰 없이 살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면 다시 돌아갈 테니까, 편한 길(편하다는 게 무엇일까)로 갈 테니까. 'lte 무제한 요금제 - 이어폰 - 휴대폰' 이런 조합을 가지고도 내가 욕구에 무심할 거라는 자만은 하지 않는다. 나는 요금제를 낮췄고 이어폰은 가능한 두고 다닌다. 데이터가 느리기에 실시간으로 영상을 보고 싶어도 답답해서 볼 수가 없다. 와이파이가 있더라도 이어폰이 없으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위의 시선에도 무심히 큰 소리로 휴대폰을 사용할 만큼 씩씩하지는 않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영상을 보는 게 줄었다. 이젠 항상 가방에 책을 들고 다닌다. 그러면 이동 중에 뭐라도 하고 싶을 때 자연스레 책에 손이 간다. 인터넷 속도는 느리고 이어폰도 없으니까. 흔들리는 버스, 지하철에서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우니 자연스레 책으로 손이 간다. 놀이가, 유흥, 오락이 내가 가려는 길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만화가가 되려고 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이야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영상물에 대한 욕구를 영화를 통해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굳이 나를 괴롭혀야 하는가 싶다가도 이제는 이 과정이 꽤 즐겁다. 이게 즐겁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면 의도적인 삶에 대한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엔 세이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의 노래를 내가 다 들을 필요는 없고 다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무엇에 매혹 당할 것인가.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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