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 애청자로, 지금까지 방영된 회차를 모두 봤다. 어려서부터 집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집을 찾아달라고 출연한 의뢰자의 사정을 듣고 나서 ‘어떤 집이 가장 좋을까’ 궁리하며 여러 집을 찾아가 둘러보는 과정이 흥미롭다.
집을 구해달라고 의뢰한 이들의 사정이란 주로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혹은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살았는데, 이제는 보다 여유를 갖고 살고 싶어서’와 같은 것이다. 이런 목적을 따라 집 구경을 좇다 보면 ‘집’이라는 대상을 비롯해 집을 이루는 각 공간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넓은 거실이 필요한 건 온 가족이 모여 앉기 위해서이고, 베란다가 필요한 이유는 둘이서 또는 혼자 호젓하게 차 마시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다락방이 있다면 빔 프로젝터를 설치해 우리 집 전용 영화관을 만들 수 있어서 좋고, 마당이 있다면 친구들을 잔뜩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TV 속 집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진다.
물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심지어 주말의 일부까지 직장에 할애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집에 살더라도 제대로 즐길 수없다.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마저 길다면 자는 곳과 씻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할 가능성이 높다. 마당이나 테라스가 넓은 집은 언감생심이다. 아무래도 손 갈 데가 거의 없고, 어지간한 일은 관리 사무소가 맡아주는 대단지 아파트가 제격이다. 이것은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주요인 중 하나다.
한때 우리는 정장을 입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지의 높은 건물에 위치한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멋지다고 여겼다. 드라마 주인공 대부분은 그들이었다. 아마도 그런 경향은 드라마 <TV 손자병법>이 인기를 끌던 무렵부터 시작된 것 같다. 1987년부터 6년여 동안 KBS에서 방영한 이 드라마는 종합상사를 무대로 부장, 과장, 대리, 사원 등 회사의 구성원이 겪는 일상을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무슨 업무를 하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늘 바쁘면서도 활기 있었다. 마치 직장 밖에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회사’라는 크고 안전한 세계, 그 안에서 경험하는 인간관계와 희로애락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런 세계에 속해본 경험, 그 안에서 배우는 특유의 관습과 문화는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으로 작용해왔다. 그리고 여기 속한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에 계급 차이가 생겨났다. 한국 사회 전체의 질서가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직장에 취업이 잘되는 대학의 학과 커트라인은 높아졌고, 그런 학과에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보내기 위한 방식으로 공교육이 재편됐다. 유명 기업들의 본사는 서울의 종로, 여의도, 강남 등에 집중됐고, 이를 중심으로 상업 지구가 조성되었다. 그곳으로 매일 출근하고, 야근하고, 어떤 날은 회식까지 해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지는 방사형으로 서울 외곽까지 뻗어나갔고, 그에 맞춰 대중교통망도 발달했다. 30년 이상 지속된 이 같은 질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집이란 ‘되도록 출퇴근이 용이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의미 이상을 갖기 어려웠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자녀 교육을 위해 좋은 곳’이란 의미인데, 결국 저 직장들이 있는 도심지 건물 속으로 자녀들을 밀어넣기 위한 선택이므로 크게 보면 이 질서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단단하게 지은 건물도 시간이 지나면 금이 가기 시작하듯 이 질서에도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존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정장 차림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은 드라마 주인공 자리에서 밀려났다. 아파트 중심의 도시 생활이 문화 자본 중에서 차지하던 절대적인 우위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나 TV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 이어 <구해줘! 홈즈>에서 드러난다. <구해줘! 홈즈>의 출연자들에게 지지받는 집의 형태는 아파트가 아니다. 심지어 역세권인지 여부는 그리 결정적이지도 않다. 집이 숲이나 공원 근처에 있을 경우, 이를 훨씬 높은 가치로 여긴다는 의미의 신조어 ‘숲세권’, ‘팍(park)세권’이 자주 사용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사람들은 직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또 판에 박힌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형태로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직장에 매여 있지 않은 사람,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 그런 과정 속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기존 질서가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일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게다가 일이라는 것은 그저 소득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모두의 장래 희망이자 꿈이고, 성장하며 쌓아온 문화 자본을 쏟아부어서 획득한 계급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주변 환경이 달라진다고 요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를 옷 갈아입듯 휙휙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한국에서 임금과 안정성이 높은 일자리는 여전히 도심지에 몰려 있다. 여기 들어가지 않고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 일하거나, 프리랜서 또는 1인 사업자 등으로 일하는 것을 선택하기는 힘들다. 일자리 간의 양극화, 이중화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임금과 안정성의 차이가 큰 것은 물론 ‘갑질’과 무시를 당할 수 있고 심지어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위험한 환경에 내몰릴 수 있다.
도심지가 아니라 동네에서 일하는 사람들, 서울이 아닌 소도시나 농어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기술자와 농부, 이런저런 소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패자나 패배자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직장인들은 당연하게 누려온 사회 안전망에서 배제되거나,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고 갑질과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지만,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 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결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시간이 꽤 지난 현재도 대기업과 공기업, 정부기관 입사 경쟁률은 여전하다. 이 현상을 봐서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글로벌 팬데믹이 터지기 전까지 말이다. 전 세계가 경험한 강력한 록다운(lockdown, 경제활동 제한 조치)에 비해 우리나라는 정도가 약하기는 했지만, 출퇴근하고 등하교하는 일상이 중단되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적지 않은 기업들이 처음으로 재택근무를 시도했다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경험은 중요한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일은 어디서나 할 수 있다는 것. 이미 기술은 충분히 발전했다. 꼭 하나의 건물 안에, 같은 시간대에 모든 구성원을 집결시켜야만 일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재택근무는 얼마든 가능하고, 전국에 소규모로 일터를 흩어놓거나 그룹별로 근무시간을 조금씩 달리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에게 시간과 공간 통제권을 주면
가정의 여러 사정을 조율하면서 일할 수 있어 생산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
출퇴근 시간이 줄기 때문에 그만큼 지역 공동체의 활동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일은 어디서나 할 수 있지만, 사는 곳은 신중하게 정해야 하며, 거처를 정했으면 거기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직장 사정에 따라, 혹은 자녀 교육을 위해 옮겨다니기를 반복한다면 지역 공동체라는 귀중한 자원이 결핍된 채 사는 셈이다. 자녀를 양육하거나 가족이 아파서 돌봄이 필요할 때,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을 때,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그동안 우리는 그렇게나 힘들었다. 잠시도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고, 아픈 부모님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 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많은 여성이 경력 단절자가 되기도 했고,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였다. 만일 예전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웃과 서로 손을 보태며 살 수 있었다면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테다. 물론 도움만 받으려 해서는 공동체의 진짜 일원이 될 수 없으므로, 나부터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상호적 관계가 형성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우리는 직장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말고, ‘사는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재편된다면 일자리의 양극화와 이중화 역시 자연히 완화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동네에 머물 수 있고 소도시나 농어촌에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기존의 양극화 구도에 따라 일자리를 구분하고 차별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낡은 프레임에서 비로소 해방돼 각자의 성향과 지향, 가치관에 따른 ‘좋은 일’을 찾을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독일 정부는 2016년 <노동 4.0> 백서 발간 작업을 하면서 일과 삶에 대한 노동자의 선호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자체 조사에 따르면 독일 노동자들은 일곱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노동에 대한 걱정 없이 살고 싶은 유형(28%), 열심히 일하며 풍요로운 삶을 이루고 싶은 유형(15%), 일과 삶의 균형을 찾고 싶은 유형(14%), 일 이외의 영역에서 의미를 찾고 싶은 유형(13%),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일하고 싶은 유형(11%), 일 속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 유형(10%), 유대감이 강한 공동체에서 일하고 싶은 유형(9%) 등이다. 이는 독일 사람들만의 경향은 아닐 것이다. 일과 삶에 대한 사람들의 성향은 제각각으로 다양한 것이 자연스럽다. 오로지 하나의 기준을 두고 일렬로 줄을 선 채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가 심하게 부자연스러웠던 것뿐이다.
전 세계의 숱한 목숨을 앗아간 코로나19 사태를
조금이라도 좋게 평가할 순 없지만, 그렇더라도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낡은 구조가 이제라도 눈에 보이는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만의 일과 삶을 지키려고 노력해온 수많은 사람의 열망이 작은 균열을 놓치지 않고 그 틈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디 시간이 한참 흘렀을 때 우리가 이 시기를 계기로 보다 자유롭고 나아졌다고, 그 전까지는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회상할 수 있기를.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이자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이다. 국민일보 기자와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홍보팀장으로 일했고,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에서 사회적 경제 전공 석사 학위를 받았다.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LAB2050 연구실장으로 일하며, ‘좋은 일’을 주제로 여러 연구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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