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등반은 탐방로 입구에서 시작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해발고도 0m를 출발점으로 삼은 혁신적인 트레킹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지난 1월, 혜성처럼 나타난 제로포인트트레일은 산지포구 인근의 용진교에서 출발해 제주 도심을 통과한 뒤 탐방로를 따라 해발고도 1,947m의 백록담까지 오르는 31km짜리 코스를 선보였다. 현재까지 완주자는 89명이다. 제주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며 관광 분야에 작은 돌풍을 일으킨 ‘프로 혁신러’ 유아람 대표를 만났다.
제로포인트에서 시작하는 한라산 등반은 콜럼버스의 달걀을 떠올리게 해요. 단순하지만 처음 생각해내기는 어려운 아이디어 같은데, 어디서 힌트를 얻었나요?
오래전부터 존경해온 산악인 김창호 대장이 2013년 에베레스트산을 ‘시 투 써밋(sea to summit)’ 방식으로 등반했어요. 해발 0m인 갠지스강에서 카약을 타고 시작해 강을따라 사이클을 탄 뒤 산소통없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죠. 그 도전에 감명받아 이듬해 탐방로 입구가 아닌, 서귀포항에서 시작하는 한라산 등반에 도전한 게 제로포인트트레일(Zero Point Trail, 이하 ZPT)의 출발이었어요. 방 한구석에 ‘한라산 0m부터 오르기 콘텐츠 현실화’라 써 붙여두고,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시 투 써밋’이 산악인 사이에는 이미 존재하던 개념이군요.
많은 산악인들이 해발고도 0m에서 출발해 산 정상까지 오르는 데 로망을 가지고 있어요. 김창호 대장이 2013년에 도전했던 에베레스트산 여정도 이전에 호주의 산악 팀이 올랐던 코스예요. 그러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사업을 준비하며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반인 대상의 프로그램은 국내외 모두 합쳐 ZPT가 처음입니다.
ZPT에 참여하면 0m에서 1,947m까지 어떻게 올라가게 되나요?
우선 사이트를 통해 예약하고 신청한 날짜에 산지포구에 있는 베이스캠프, 제로 스테이션을 방문합니다.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 사이 모인 후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지급받습니다. 용진교로 내려가 첫 인증 사진을 찍고 각자 트레킹을 시작하면 돼요. 자신의 속도대로 오르되, 길목에 있는 지정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 단체 대화방에 실시간으로 공유합니다. 모든 참가자가 문제없이 잘 오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최근 일부 구간을 차로 이동하는 실격 사례가 발생해 인증 방법을 한층 보강했어요.
참가자들이 트레킹하는 동안 제로 스테이션에서는 무엇을 하나요?
모니터링을 합니다. 1차적으로 코스를 따라 설치된 CCTV를 체크하며 참가자들이 무사히 지정 포인트를 통과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중간중간 차를 타고 나가 코스를 무작위로 돕니다. 부상자가 있으면 태워 오고, 잘 오르고 있는 참가자는 그 모습을 찍어 SNS 계정에 올립니다. ZPT에 도전하는 날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이고, 모두에게 응원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거든요. 실제로 SNS에 많은 응원 댓글이 달려요. ZPT 크루뿐 아니라 이전 참가자나 미래의 도전자가 서로 마음을 나누죠. 이 연대감 역시 프로그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닌가 해요.
사실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돈을 내고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아도 같은 코스를 따라 한라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ZPT는 무엇을 팔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ZPT의 핵심은 단순히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니에요. 참가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등반에 성공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해요. 해안에서 한라산을 보면 정상이 까마득해요. 오늘 안에 걸어서 저 꼭대기에 도착한다는 게 믿기지 않죠.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목표가 실현됩니다. 중요한 건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라 해도 제로포인트에 서는 용기, 나의 한계에 도전하는 용기입니다. 실패하면 어떤가요. 다시 도전하면 되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도전하면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나요. 그런 도전을 해보라고 ZPT는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힘든 도전을 시작하거나, 이미 성공했거나, 실패했지만 다시 시도하려는 이들 사이에 생기는 자발적인 연대가 있습니다. 이런 무형의 것들을 팔고 있기 때문에 거쳐 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디렉터인 제 역할은 작아진다고 느껴요. ZPT의 가치는 참가자들이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거니까요.
현재 코스 외에 다른 코스도 준비 중인가요?
산지포구에서 출발해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를 ‘오리진’이라 부릅니다. 산지포구는 제주 원도심에 위치한 항구로, 예로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접점이었죠. 이곳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최고봉을 걸어 올라가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북쪽 사면의 오리진을 시작으로, 서귀포항에서 출발하는 ‘사우스’, 성산일출봉이 시작점인 ‘이스트’, 수월봉부터 서쪽 능선을 따라가는 ‘웨스트’를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에요. 네 코스 모두 등반에 성공하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거고요. 마스터플랜에는 육지와 해외 확장 계획까지 있는데, 그럴수록 제주가 더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 ZPT를 경험해본 사람이 그 시작인 제주를 방문해 오리진에 다시 도전하는 선순환을 기대해요. 기상 악화로 한라산 입산이 통제될 때를 대비해 대신 즐길 수 있는 서브 코스도 기획 중이고요.
제주 관광 트렌드를 어떻게 읽고 있나요?
올레길이나 맛집, 카페 같은 제주 여행의 기존 범주가 식상해지고 있어요. 당장 패러다임이 바뀌진 않겠지만,
기존 제주 콘텐츠와 차별화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거예요. 한때 한 달 살이 같은 장기 여행이 유행했다면, 요즘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짧은 기간 제주를 방문하는 ‘치고 빠지기’ 식의 여행 패턴이 생겨났어요. ZPT에 도전하기 위해 제주를 찾는 분들이 그렇죠. 이 흐름에 맞는 콘텐츠가 계속해서 나오지 않을까요.
또 어떤 흐름이 가시화될 거라 예상하나요?
다양성이 키워드가 될 거예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기꺼이 돈을 쓰는 시대잖아요. 사람들이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 잘 잡아내 사업화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겠고요. 지난 경험을 예로 들자면 2014년부터 머릿속에만 있던 ZPT에 대한 구상을 현실화하는 데 한국관광공사 공모전이 큰 도움이 됐어요. 도전을 위한 토양을 만들어주는 지원 프로그램이 많아지기를 기대해요.
혁신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구체적인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테니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답해볼게요. 남들이 뭐라 하든 각자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지키는 것이 혁신의 조건이 아닐까요. 그럴 수 있어야 혁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코로나 시대에 제주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인파가 몰리는 관광지를 피해야 하는 지금 상황이 역설적으로 제주를 구석구석 돌아보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요. 제주가 지켜야 할 가장 핵심적인 관광자원은 자연일 거예요. 비자림이나 사려니숲처럼 유명한 숲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 같은 자연이 가득한 곳이 제주죠.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제주를 만나기 위해 시도한다면 오히려 더 큰 위안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제로 스테이션
ZPT에 도전하는 이들을 위한 베이스캠프이자, 모든 방문자와 ZPT의 가치를 나누는 카페다. 완주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름을 각인해 이곳에 전시하며, 간단한 캠핑·하이킹용품과 함께 티셔츠, 팔찌 등 ZPT 굿즈를 구매할 수 있다.
제주시 산지로 25 / zeropointtrail.com / @zeropointtrail
LNN 친환경 쓰레기봉투
제로 스테이션을 방문하면 ‘LNN(Leave No Nothing)’ 문구가 쓰인 친환경 쓰레기봉투를 무료로 제공한다. LNN은 떠난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을 모토로 하는 백패커 사이의 원칙 ‘LNT(Leave No Trace)’에 착안해 ZPT가 제안하는 쓰레기 줍기 캠페인이다.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가져갈 뿐 아니라 남의 것까지 주움으로써 사람들이 다녀갈수록 깨끗해지는 자연을 꿈꾼다.
하이커 박스
짐을 가볍게 유지해야 하는 하이커나 백패커가 자신에게 필요없는 물건을 다른 사람이 쓸 수 있게 남겨두고 가는 박스로, 산티아고 순례길 등에서 볼 수 있다. 제주를 찾은 여행자 누구나 제로 스테이션에 들러 박스에 물건을 두거나 가져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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