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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커넥트 Oct 21. 2020

제주와 세대와 미래의 커넥터들(2)

부정혁 클로 대표

제주 출신으로 서울에서 성공한 리더가 애정을 담아 고향 제주의 창업과 투자 생태계를 바라보는 소회를 전해왔다. 자신의 지난 시간과 경험을 반추하며 후배들이 걸어갈 현장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다는 출사표와 함께.



2009년, 3차원 그래픽 의상 디자인 소프트웨어 벤처기업인 클로버추얼패션(이하 클로)을 설립했지요. 클로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홍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대학 시절 IT 분야 창업 후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졸업 무렵, 친구 소개로 현재 클로의 파트너인 오승우 대표를 만났어요. 노트북으로 3D 의상 시뮬레이션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카이스트 재학 중 완성한 기술이었어요. 당시 기술의 비주얼은 프로토타입이었으니 지금과 같은 완성도는 아니었지만, 내용물을 보고 정말깜짝 놀랐어요. ‘이건 진짜다’ 하는 걸 알아봤으니까요. 이 기술을잘 살리면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습니다. 클로는 의상을 실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핵심 기술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기술은 월트디즈니 같은 기업이 갖고 있던 거였어요. 그렇다면 클로는 무엇이 다른지 생각했습니다. 온라인 환경에서 옷을 만드는 기술은 여러 회사가 갖고 있었지만, 클로의 차별점은 실제 데이터로 실사처럼 만든다는 것이었어요. 찰흙 빚듯 컴퓨터 그래픽으로 옷감 겉면의 주름을 하나하나 입힌다고 했을 때 클로의 방식은 실제 섬유를 재단한 도면값을 입력해서 인체에 입히고, 이를 시뮬레이션하면 주름이 실제와 같이 만들어져요. 따라서 주름을 한번 만들면 다른 사람에게 입혀도 주름의 결과가 같아지죠. 이런 방식으로 옷을 만들면 가상의 옷뿐만 아니라 실제 옷도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실제 옷을 만들기 위해 클로의 기술을 적용하면 가상의 옷이 하나 더 생기고요. 이 기술에 세상이 어떤 가치를 매길 것인가에 대해선 시간이 지나면 유저가 알려줄 거라 봤습니다. 그건 클로의 비전이었죠. 그런 세상을 만들자는 것. 여기 공감했고, 발전시키며, 확신을 다져갔습니다. 가치와 비전에 대해 늘 공유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오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가치를 실현시키면 확신은 더 강해지는 법이죠.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고요. 그렇게 10년이 지난 겁니다.

10년 전 처음 본 기술과 현재 기술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요?
그때는 그래픽이 만화 같았어요. 현재는 육안상 가짜 옷인지, 진짜 옷인지 좀처럼 구별할 수 없어요. 중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핵심적인 기술 측면에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고 그대로라는 점이에요.

대학 시절부터 다수의 창업 경험을 쌓았다고요.
인터넷 한글 도메인을 만드는 아이템으로 처음 창업을 했습니다. 대학 때 창업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첫 회 창업경진대회에서 대상을 타면서 1호 대학생 창업가로 활동했습니다. 1996년인가, 1997년이에요. 이메일 주소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만큼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은 시절에 인터넷 주소를 한글로 입력한다는 점을 참신함으로 인정받은 거였죠. 네이버보다 먼저 창업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대회에서 상 받기에 딱 좋은 아이템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수상자 자격으로 사무실을 제공받고, 창업 비용을 지원받았어요. 창업에 관심이 있었지만, 친구들끼리 재밌는 것을 해보자고 모여 노는 수준이었죠. 초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PC통신으로 놀던 것이 자연스럽게 IT와 컴퓨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요. 놀이의 하나로 여겼으니 마인드나 현실 조건 등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고, 창업이 잘될 리 없었죠. 두 번째, 세 번째 창업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실패를 경험했어요. 졸업반이 되어 창업이냐 취업이냐를 결정할 무렵, 창업을 선택했죠. 물론 전보다 경험이 쌓였고, 밀도 있게 고민했고, 신중해질 수 있었어요.

클로는 의류 제작 소프트웨어 ‘클로3D(CLO3D)’와 애니메이션 캐릭터 의상을 만드는 ‘마블러스 디자이너’, 두 축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요.
두 가지 프로덕트,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쓰는 소프트웨어와 패션 회사가 쓰는 소프트웨어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이 소프트웨어는 거의 같다고 보면 돼요. 차이점이 있다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쪽은 작업자가 이미 컴퓨터에 익숙하다는 것이죠. 업계 사람 대부분이 컴퓨터로 일하거든요. 섬세한 디테일로 화제를 모은 ‘엘사’의 드레스처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속 캐릭터의 의상에는 대부분 클로의 프로그램을 씁니다. 예전에는 ‘슈렉’이 옷을 하나만 입고 등장했다면, 클로의 프로그램을 쓴 후론 캐릭터가 여러 겹의 옷을 입게 됐어요. 펄럭거리거나 주름 진 움직임이 훨씬 생생해졌죠. 다른 한 축은 패션인데, 2009년 창업과 동시에 문을 두드렸던 시장이에요. 2015년, 2016년 이전까지는 패션 기업이 클로의 소프트웨어를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소프트웨어를 적용했을 때 패션 회사의 프로세스가 싹 바뀌거든요. 또 작업자 한 사람이 바꾼다고 그이만 바뀌는 게 아니라, 앞뒤 공정의 작업자가 같이 바꾸어야 해요. 전후 공정에 따라 회사와 협업하는 공장, 소비하는 회사, 백화점 등 모조리 바뀌어야 하는 문제라 소프트웨어 하나 공급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오랫동안 수많은 패션 회사에 살다시피 했어요. 그러다 변곡점이 생기면서 한두 곳의 회사가 소프트웨어를 쓰기 시작했고, 연결된 다른 회사가 연쇄적으로 쓰게 된 것이었죠.

클로의 변곡점은 언제, 누군가에 의해 일어났나요?
한 벤더(공급자)였어요. 패션 시장이 정말 흥미로운 세계인데, 1960년대부터 국내 여성들이 재봉틀 가동해서 섬유 산업을 일으킨 것이 오늘 한국 패션계에 굴뚝 산업처럼 굳게 남아 있더라고요. 제일모직, 엘지패션 같은 저명한 내수 브랜드가 아닌, 일명 ‘벤더’라고 하죠. 자라나 유니클로 같은 기업에 옷을 납품하는 OEM 회사들이에요. 영원무역, 세한상회, 한세실업, 한솔무역 같은 곳은 오래되고 견고한 회사거든요. 이들은 주로 해외시장에 있는 바이어를 상대하고, 현지 시장에서 많은 주문을 받는 것이죠. 옷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차별화가 필요했고, 그 차별화로 클로의 기술을 도입한 거예요. 3D로 옷 만든 과정을 보여주었지요. “팔 길이를 늘려줘” 하면 늘려서 보여주고, “색상 더 보여줘” 하면 색상을 바꾸고요. 바로바로 소통이 되니 바이어들이 반응했어요. 벤더들이 점점 클로에 찾아왔어요. 2015년, 2016년쯤이네요. 최근에는 코로나 여파로, 기존에 옷에 대해 갖고 있던 관습이 바뀌었죠. 물론 지금도 옷은 눈으로 봐야 만들지, 컴퓨터로 어떻게 아느냐고 하는 보수적인 사람이 많아요. 옥신각신하던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로 3D를 도입하자고 말해요. 컴퓨터 그래픽 시장과 패션 시장을 놓고 봤을 때 컴퓨터 그래픽 쪽에서 앞서긴 했지만, 패션업계는 규모를 비교할 수 없는 시장이에요. 패션 시장에서 1%의 셰어율을 가진 기업이 아직 없어요.전체 시장의 1%를 셰어하는 회사가 아직 없다는 게 믿어지나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클로는 패션 회사에 소프트웨어를 팔아 돈을 벌자고 시작한 회사는 아닙니다. 패션 회사, 영화 회사, 게임 회사가 클로의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만들어내다 보면 콘텐츠가 생기겠죠. 그 안에는 모든 데이터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 데이터로는 더 큰 것,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클로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고요.

스타트업의 기본으로 비전을 중요시하는데, 클로가 지향하는 비전은 무엇인가요?
머지않아 매장에 가지 않고도 원하는 옷을 자신의 체형에 맞춰 입혀보고 쇼핑하는 일이 가능해질 겁니다. 클로의 기술을 구현한 플랫폼을 통해 그런 일이 가능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플랫폼에 사용자의 데이터가 축적되면 그의 체형과 취향, 주머니 사정까지 알 수 있어요. 또 모바일이나 컴퓨터에는 SNS상에 ‘좋아요’를 누른 것부터 출신 학교나 직업과 직장, 뭘 샀는지, 어디가 아팠는지 하는 정보가 결합돼 남아 있어요. 한 사람의 거의 모든 걸 알게 되는 것이죠. 만약 내일 비가 온다고 했을 때 연결된 클로 API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잘 맞는 사이즈, 살 만한 가격의 옷이 할인 쿠폰과 함께 전송됩니다. 이런 기술을 구현한 플랫폼의 가치는 어마어마할 거예요. 지금까지 누구도 갖지 못한 거니까요. 앞으로 방대한 데이터 자본을 가진 회사가 다음 세대의 승기를 잡을 겁니다. 그걸 해내는 것이 클로의 비전이에요.

제주 출신이면서 스타트업 선배로, 지역의 창업 후배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면요. 도내 창업 생태계를 보며 어떠한 투자 의지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리더십을 잘 발휘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래서 리더를 선임해 일임했어요. 그 자리에 맞는 리더가 될 수 없다면 저처럼 하면 돼요. 역량 있는 사람을 찾아서 같이 하는 것이죠. 중국에 진출하려면 중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건 고루한 생각 아닌가요? 비전이 맞는 중국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요. 말이 통하지 않으면 통역가를 찾으면 되고, 번역기를 쓸 수도 있죠. 기업이 어떻게 글로벌 시장을 이해하고 대응하느냐가 중요해요. 앞으로는 국내, 국외 구분 없이 서로 열릴 수 밖에 없으니까요. 제주는 IT 분야로 봤을 때 분명한 강점이 있는 곳이죠. 그 인프라 조성을 위해 인력을 양성하는 일이 급선무예요. 클로 역시 여기 투자할 의지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조력할 생각입니다. 또 스타트업 비즈니스를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원하는 이들에게 알려줄 것이고,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응할 겁니다. IT 분야를 비롯해 스타트업을 준비하거나 몸담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넓게 보라는 것입니다. 2009년 홍대 앞 골방에서 연구할 때 루이비통 관계자가 찾아왔어요. 이제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시대인데, 굳이 특정 지역으로 목표를 한정할 필요가 있나요? 일터가 제주에 있다면 소비자가 서울에 있든 해외에 있든 상상하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기왕 시작했다면 글로벌하게 시도하자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재택근무가 일상이 된 요즘은 그런 생각도 해요. 디지털 노매드의 천국이 발리잖아요. 제주가 또 다른 발리가 되는 상상을 하죠. 외지 작업자를 대거 유입해서 제주를 디지털 노매드의 성지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제주에 해당 산업의 바탕이 만들어질 거예요. 손에 닿는 현실이 되면 그 토대에서 제주 사람들이 창업해보고 싶을 테고, 회사의 좋은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게 되고, 서울과 세계 각지에 흩어진 기업과 원격으로 일하는 기회가 생길 겁니다. 산업의 환경이 생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기획  발행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제작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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