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커넥트 Oct 28. 2020

코로나시대, 로컬의 가까운 미래 Ⅱ

CIRI  1차회의-②

*CIRI 1차회의-①편(이전글)에서 이어집니다. 




Session.1  초청강연

코로나19 시대 지역 커뮤니케이션,

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된 가치를 건드려라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



반갑습니다. 강연 준비를 하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이런 종류의 논의를 나누는 자리가 앞으로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접촉 등 익숙한 단어들이 나오는데요, 저는 오늘 그런 얘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빠져 있는 부분에 관해 말하려고 합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절실한 부분이지만, 마을 공동체, 사회혁신, 국가 정부기관에서 만드는 정책 등 모든 곳에서 등한시되는 ‘가치문제’입니다. 



갈등 해소를 위한 접점 찾기, 나침반은 ‘가치’다

 

얼마 전, 기본소득[1]과  전국민 고용보험[2]이라는 정책 아이디어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정책과 제도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싸우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핵심은 각각의 정책이 어떤 가치를 옹호하려는 지에 있습니다. 제 생각엔 기본소득이든 전 국민 고용보험이든 이 제도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모두의 소득을 모두가 함께 보장하자’입니다.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동일한 목적과 가치를 지향하면 절충하거나 합의할 수 있습니다.

 

정책과 제도가 논쟁이 될 때 뜻을 합쳐 일을 풀어나가려면 싸움을 위한 싸움을 만들어선 안 됩니다. 이때 퍼실리테이터의 일은 차이점을 부각해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뒤로하고 둘 사이의 접점을 찾는 것입니다. 그 접점을 찾는 아이디어, 나침반에 해당하는 게 바로 ‘가치’입니다. ‘가치, 밸류(value)’는 지난 20~30년간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모든 지식인과 정책 입안자들에게 등한시됐던 말입니다. 가치보다는 정량적 성과와 기능적 관점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집중했죠. 이렇듯 가치라는 개념을 논하기 어려운 이유는 가치가 ‘합의’를 통한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1] 기본소득: 재산·노동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 지급하는 소득으로, 조건 없이 빈곤선 이상으로 살기에 충분한 월간 생계비를 지급하는 것. 탈노동 패러다임 위에서 '노동과 소득의 연계'를 끊거나 최소한 완화하자는 입장. (출처: 박문각 시사상식사전)

* 참고 기사: ‘기본소득’보다 ‘전 국민 고용보험’이 먼저다 (프레시안, 2020.06,11)

[2]전 국민 고용보험: 사람들이 유급노동에 참여한다는 것을 전제로 ‘일하고 있거나 일할 의사가 있지만 일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소득 보장을 꾀하는 것. 고용보험의 대상을 노동자 기반에서 취업자(특수고용 노동자, 자영업자, 프리랜서 등도 포함) 기반으로 사회보험의 틀을 바꾸자는 입장. 

 

300년 전의 세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불경과 성경에 쓰여 있는 종교적 가치를 근거 삼아 사람들이 쉽게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사회가 다변화되면서 가치 합의를 위해 더욱 큰 비용과 많은 시간이 필요해졌습니다. 가치가 현실에서 힘을 가지려면 사람들이 그것을 내면화해야 합니다. 실제로 합의한 가치를 스스로도 ‘가치로서’ 느껴야 합니다. 예를 들면, 3천 년 전과 달리 식인과 근친상간을 터부시하는 것은 현존하는 인류와 문명이 합의한 가치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모두가 가치로서 내재하고 합의한 것이죠. 

 

퍼실리테이션을 할 때 돈이나 기능적인 얘기에 집중하면, 다른 의견만 발생하고 일은 진전이 안 됩니다. 일이 진행되려면 사람을 주체로 인식하고,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중요시하는가에 관해 아주 진실한 합의를 해야 합니다. 

 


가치가 바뀌어야 시스템이 바뀐다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은 전 세계 산업문명을 유지하는 패러다임의 기본 가치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과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 도넬라 H. 메도즈(Donella H. Meadows)[3] 박사의 논문 중에<레퍼리지 포인트(Leverage Points: Places to Intervene in a System(1997)>라는 전설적인 논문이 있습니다. 레버리지 포인트, 즉 ‘개입지점’이라고 하는데요. 이미 존재하는 시스템은 절대 바뀌지 않는데, 이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면 어디에 개입해야 하느냐에 대해 다룬 논문입니다. 

 

우선 시스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을 땐 그에 기생해야만 어떤 일이든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거나 협동조합을 만드는 활동을 하려면 공무원, 지역 유지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관계로 빚어진 시스템 안에서 하려던 일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예시일진 모르겠으나 이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사망률이 낮은 이유와 유사합니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죽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빨리 파악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지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면 기성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3] 도넬라 H. 메도즈: 미국의 환경과학을 이끈 과학자이자 저술가, 시스템 분석가.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8년 하버드 대학에서 생물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2년부터 다트머스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1990년에는 월터 페인 과학교육상을, 2001년 사망한 후에는 보존법칙재단이 수여하는 환경 분야 대상을 받았다.

 

메도즈 박사가 얘기하는 시스템은 여러 개의 행위자가 붙어서 하나의 논리로 복잡하게 관여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스템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가령, 어느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이사장이 성폭력을 휘두르는 등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 명백한 증거를 잡아서 다음 날 폭로하고 신문에 기사가 나가도 조직의 시스템은 바뀌지 않습니다. 가해자가 잠깐 정직 처분을 당할 순 있지만, 이내 조직으로 복귀할 겁니다. 위력에 의해 성폭력이 벌어질 만한 권력 구조 자체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보통 문제를 고발한 사람이 조직을 나가면서 사건이 끝나 버리기 쉽습니다. 지금은 이 문제 자체를 논하려는 게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를 먼저 말씀드리는 겁니다.

 

메도즈 박사는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시스템에 개입하는 레버리지 포인트를 제일 보수적인 것부터 본질적인 것까지 열두 개 정도 나열했습니다. 그중 두 번째가 바로 ‘사람들의 가치’입니다. 가치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패러다임을 결정합니다. 즉, 이 말은 다수의 사람이 믿는 가치가 바뀌지 않으면 시스템 역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넬라   H. 메도즈 박사가 제시한 12가지 레버리지 포인트

1.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힘     

2. 시스템(목적, 구조, 규칙, 지체, 매개변수 등)을 발생시킨 사고방식이나   패러다임

3. 시스템의 목적                    

4. 시스템 구조를 추가하거나 변화시키거나 진화시키거나 자기조직화하는   힘

5. 시스템의 규칙(인센티브, 처벌, 제한 등)        

6. 정보 흐름의 구조(정보에의 접근 권한을 가진 경우와 가지지 못한   경우)

7. 양성 피드백 고리들이 가진 힘       

8. 음성 피드백 고리가 어떤 영향력을 수정하는 힘

9. 시스템 변화 속도에 비례한 지체(delay)의 길이           

10. 물질적 비축 및 흐름의 구조(교통망, 인구연령구조 등)

11. 흐름에 비례한 버퍼(및 기타 안정화하는 비축)의 크기        

12. 상수들, 매개변수들, 숫자들 (지원금, 세금, 표준)


*출처 

(원     문) Leverage Points: Places to   Intervene in a System(Donella H. Meadows, 1997)

(번역자료) 시스템 변화에 효과적인 12지점

              (정리자정백수,http://commonstrans.net/?m=201903&print=pdf-search)




<성장의   한계> 소개

저자: 도넬라 H. 메도즈, 데니스 L. 메도즈, 요르겐 랜더스 저,   김병순 역

출판사: 갈라파고스

발행일: 2016년 11월 29일

원서 제목: 《Limits To Growth: The 30-Year   Update》(2004)

세계 저명학자들의 모임인 로마클럽의 의뢰를 받아 4인의 MIT 연구원이   1972년 발표한 ‘인류의 위기에 관한 프로젝트’ 보고서를 바탕으로 엮은 책. 한정된 자원 안에서 기하급수적으로 경제와 인류가 성장할 경우 가까운 미래에 닥칠 결과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도출했다. 브레이크 없는 경제 성장이 지구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 원인과 전망을   분석하고, 성장주의의 가공된 신화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미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참고:http://digital.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Detail.ink?LINK=NVE&category=001&barcode=4808990809421




코로나19 이후, 시스템의 바이탈 펑션이 변화한다

 

제가 시스템을 설명할 때 의학용어 중 즐겨 활용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이탈 펑션(vital function)[4], 즉 생명 기능이죠. 생명을 유지하려면 호흡과 각종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기본적인 바이탈 펑션이 있어야 합니다.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치가 있고 패러다임이 있으면, 그다음 바이탈 펑션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바이탈 펑션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우선순위가 주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바이탈 펑션은 뇌간에서 시작됩니다. ‘괴롭다’는 감정이 일렁인다고 가정해 보죠. 이 감정 때문에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와 별개로 심장 운동을 관장하는 뇌의 아주 깊숙한 핵심부의 기능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갑니다. 괴로운 마음에 술을 마시고 난리를 쳐도 심장은 심장대로 움직이면서 몸의 기능을 유지하죠. 그 기제가 바이탈 펑션입니다. 

 

어떤 시스템이든, 그 시스템의 기초는 패러다임(paradigm)[5]이고 그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바이탈 펑션이 있습니다. 바이탈 펑션이 생긴 후에는 부수적으로 위계와 순서가 만들어집니다. 바이탈 펑션이 잘 돌아가는 좋은 상태가 되면 여러 펑션이 붙게 되어 있어요. 이 상태를 ‘어플루언트(affluent)’하다고 합니다. 피어나고 있다, 잘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4] 바이탈 펑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뜻한다. 주로 호흡과 심장박동, 혈액순환을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기능을 의미한다.

[5] 패러다임: 어떤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테두리로서의 인식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제안한 개념이다. 


가부장적인 가정의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겠지만, 1970년대까지도 ‘집안은 무조건 장남이 잘돼야 한다. 장남이 잘돼서 제사를 지내야 집안이 유지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황당한 주장이지만, 이 시스템은 최소한 몇백 년 이상 이어져 왔습니다. 그 결과 이 집안에서는 맏아들 이외의 자녀들은 자연스레 희생됐습니다. 맏아들은 법대를 보내서 고시 공부를 시키는 등 전적으로 지원했지만, 나머지 자녀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죠. 심지어 딸은 중학교조차 안 보내는 집이 많았고요. 장남이 제일 중요하다는 가치 시스템이 있고 그에 따른 패러다임이 만들어진 거죠. 황당한 건 장남이 아닌 다른 자녀들도 장남 우선 가치를 공유하면서 ‘형 혹은 오빠가 잘돼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희생하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경우의 수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케이스입니다. 장남이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검사가 되면 그다음부터 장남이 동생들에게 사업체를 줍니다. 동생들도 잘 되고 집안 전체가 잘 됩니다. 그런데 장남이 고시에 떨어졌어요. 보통 세 번째 떨어지면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네 번째 다섯 번째 떨어지면 ‘장남에게 자원을 더 집중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시점이 옵니다. 여기서 이 ‘장남 중심 패러다임’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가가 시험대에 오릅니다. 이때 바이탈 펑션만 남는 거죠. 이 집안의 바이탈 펑션은 무조건 맏아들이 고시에 붙는 거예요. 그래서 동생들의 결혼, 취직 등은 다 부수적 펑션이 되어 뒷전으로 밀립니다. 

 

이 시스템의 바이탈 펑션이라는 개념에 아까 메도즈 박사가 얘기한 개념을 붙여볼 수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믿는 가치와 패러다임, 거기서 뻗어 나오는 바이탈 펑션을 붙여 보면 시스템이 위기 상태에 닥쳤을 때 어떤 행태가 나오는지 너무나 분명하게 보입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이 가정 시스템이 잘 돌아갔습니다. 맏아들이 고시 1차를 붙었어요. 2차, 3차도 붙을 것 같아요. 이쯤 되면 집안 분위기가 들떠요. 동생들도 ‘우리 형, 오빠가 곧 검사가 된다’고 말하고 다니면, 무언가 이익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주변부에 생기겠죠. 돈도 쉽게 융통하고 대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시 3차에서 할아버지가 부역자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맏아들이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되면 집안이 망하는 거예요.

 


경제 회복에서도 더욱 벌어지는 양극화, K자 회복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IMF에서는 세계 경제성장률이 -3%[6]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올해 3~4월은 전 세계 경제가 패닉 상태였어요. 이렇게 바닥을 치고 경제가 회복될 때의 상태를 예측하는 그림으로 K자 회복[7]이 등장합니다. 

 

기존 시스템은 경제 회복을 명분으로 기업과 금융 산업에 엄청난 자금을 몰아줄 겁니다. 기업은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빌릴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빌린 돈을 부동산 투자 등 각종 자산시장에 퍼붓겠죠. 그 결과, 자산시장은 위로 성장하는 반면 실물경제에 속하는 소비시장과 산업, 노동 환경은 계속 내리막을 걷게 됩니다[8]. 이것이 K자 회복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금융 시스템이나 재분배 시스템의 현재 모습이기도 합니다. 

 

K자 회복 현상이 유지되면 위에서 투기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겁니다. 하지만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작동하는 시스템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이 듭니다. 이들 입장에서는 시스템의 존재 의미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겠죠. 

 

[6] IMF는 선진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을 -6.1%, 세계경제는 -3%의 역성장을 전망했다. (출처: ‘IMF, "올해 세계 경제 -3% 역성장", 아시아경제, 2020.04.14, 백종민 뉴욕 특파원) 

[7] K자 회복: 경기 회복 시나리오 중 그래프의 형태가 알파벳 K자 모양을 띠는 것. 금융 경제는 상승하고, 실물 경제는 하락하는 양극화 양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8] 경제는 거래 행위를 기본으로 하며 거래 대상에 따라 실물경제와 금융경제로 구분된다. 실물상품이 거래되는 경제는 실물경제로, 실물상품은 일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의미한다. 이때 소비, 투자, 수출입, 실업률, 임금, 물가 등을 실물지표로 본다. 금융경제는 금융상품이 거래되는 경제로 금융경제와 관련된 주가, 환율, 금리 등을 금융지표로 본다. K자 회복은 금융지표의 성장에만 집중한 결과 실물지표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상태를 일컫는다. 



K자 회복을 만드는 기존 패러다임의 가치 세 가지

 

최근 30~40년간 문명의 근본 패러다임을 구성해 온 세 가지 가치를 나열하겠습니다. 

무한 팽창이 최우선이다.

집단보다 개인이 우선이다.

대중은 주체적이지 않다.


첫 번째 가치는 자본, 경제지표 등으로 대표되는 ‘경제력의 무조건적 무한 팽창’입니다. 우리 집의 재산, 회사의 총 자산가치,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9] 등의 무한 팽창을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으로 이루어졌다’입니다. 집단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집단이 필요하고 좋은데, 우선 생각하고 행동하는 단위가 개인에게 있죠.

세 번째 가치는 ‘항상 대중은 대상이다’입니다. ‘돈과 폭력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은 생각하고 움직이는 생물이 아니다, 대중은 꾀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기존 시스템의 패러다임은 이 세 가지 가치 명제로 이루어져 있어요. 여기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생겨났고요. 전 세계 사람들은 30~40년 동안 이 명제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품에 불과하며, 누군가 돈을 주거나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내가 무언가를 할 이유도 없고, 할 생각도 없고, 할 능력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 때 ‘우리 마을은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제주도는? 우리 대한민국은? 인류는? 지구는?’ 소리를 하면 비난만 쏟아집니다. 그런 비난의 목소리를 들으면 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죠. 이미 길들여져 있으니까요. 사회나 집단에서 하는 행위가 정당화되려면 ‘돈이 불어나느냐’를 기준 삼은  수치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합의도 만들어지지 않아요. 이미 그렇게 길들여진 사회이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 코로나까지 닥쳤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당연히 K자 회복의 양 끝단이 더욱 벌어집니다. 

 

이때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도대체 어떤 시스템인지’, 즉 가치체계를 물어봅니다. 그러다 점점 ‘이 시스템의 바이탈 펑션이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절박한 문제는 바이탈 펑션에 관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회의 현재 시스템에서는 ‘경제 성장’을 바이탈 펑션으로 봐요. 경제가 성장하고 자산가치가 살아나고 사람들이 경제생활을 잘 해야 하는 건 분명한 사실인데, 그러려면 무조건 경기가 살아나고 GDP가 올라가야 한다는, 기존에 알고 있던 바이탈 펑션을 또 얘기하는 거죠. 

 

기존의 기제대로 바이탈 펑션을 돌리고자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경제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노인 요양소 같은 곳은 소외됩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 가치 시스템과 패러다임에 균열이 오기 시작하는 거죠. 


[9] GDP: 일정 기간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것을 의미하며, 보통 1년 기준으로 측정한다.

 


코로나19 이후 사회를 움직일 대안적 가치 세 가지

 

제가 생각하는 대안적인 가치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경제와 사회의 목표는 사람·자연·사회가균형을 이루는 좋은 삶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사람은 대상이나 객체가 아니다.

 

첫 번째 가치는 ‘사람·자연·사회가 균형을 이루는 좋은 삶을 만드는 것’을 경제와 사회의 목표로 두는 겁니다. 무한 팽창·무한 성장이 아니라요.

두 번째 가치는 ‘사람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인과 집단을 대립 관계로 보기보다는 유기체적인 세계 안에서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세 번째 가치는 ‘사람은 더이상 대상이나 객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한다면 자기 자신을 움직여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는 것, 즉 자율적인 주체로서 사람을 바라보자는 겁니다.

 

이 대안적 가치에 근거해 우리가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먼저, 코로나19로 인해 기존 시스템이 갖고 있던 바이탈 펑션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이들이 모인 주변부에서 무수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한두 달 전쯤, 필리핀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강화된 사회적 격리(ECQ, Enhance Community Quarantine)’로 교통 시스템이 마비된 적이 있어요. 이 때문에 교통이 열악한 외곽 지역에 사는 여성들이 피임약을 구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10]. 이런 문제를 비롯해 각종 사회 문제는 계속 생겨날 겁니다. 하지만 기존 시스템은 바이탈 펑션인 경제 살리기가 중요하고, 그다음을 방역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삶과 밀접한 영역에서 문제가 연이어 발생합니다. 이 포인트가 바로 사회 혁신이 일어나야 할 부분입니다.

 

기존 시스템이 멀쩡할 때는 그 시스템 논리에 적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존 패러다임, 가치관, 바이탈 펑션이 통하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사회 혁신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대안적 가치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이탈 펑션에 밀려서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겐 매우 절박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한국 노동시장이나 사회복지 시스템은 방과 후 교사에 관한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또 노인정에서 일하면서 조금이라도 벌던 자원봉사자나 아르바이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이들은 바이탈 펑션에서 밀려난 사람들인데요. 이 부분에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할 때, “우리 여기서 모이면 자산가치 50% 상승 가능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라고 해야죠. 사람들에게 문제를 외면하면 안 된다고 얘기할 때, 옛날의 가치를 기준 삼아야 할까요? 그건 아니에요. 새로운 가치가 중요합니다. 


[10] 참고기사: ‘부부의 날: 코로나19로 피임을 할 수 없는 여성들’ (BBC코리아, 2020.05.21)

 


앞으로의 커뮤니케이션, 대안적 가치를 건드려야

 

최근 여러 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건 상황이 절망적이고 답이 없다는 겁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대면 접촉을 늘리자, 줌(Zoom)을 넘어서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자’와 같은 기술적 해법을 얘기하는데요. 현재 사람들이 원하는 건 기술적인 해법이 아니라 ‘더 많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돈벌이 방법 같은 기능적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내면의 가치와 필요를 건드리는 깊은 차원의 얘기를 해야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이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가’에 대해 궁극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건드리세요. 기성 가치로만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세요. 우리가 원래 지향하려고 했던 사회적경제, 사회혁신에는 근간을 이루는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 가치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순간이에요. 거기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합니다.

 

기본소득, 참여소득 등 거창한 정책 아이디어도 좋고, 마을 차원에서 ‘가게나 하나 만들어 보자, 공동으로 앱을 만들자’ 하는 작은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어떤 얘기든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려면,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나누고 그에 대해 마음껏 떠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아이디어든 진전이 가능하겠죠. 누군가는 그 매개 역할도 해야 할 테고요.

 

아까 말했듯이, 지난 10~20년간 이 사회를 제일 심하게 짓누른 건 가치허무주의입니다. 가치에 대해 절대로 얘기하지 않는 풍토가 있어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현존하는 패러다임의 어떤 가치가 위기에 처했는지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대안적 가치를 얘기할 수 있는지, 대안적 가치에 근거해서 어떤 일을 해볼 수 있는지 또다시 얘기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인 상황과 언어 안에서 우리는 함께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 매개가 바로 ‘가치’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그런 상황은 우리 눈앞에 벌어졌다고 봐야겠죠.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CIRI 1차회의-③편(다음글)으로 이어집니다. 





* 게재된 글이나 자료를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의 허락 없이 무단 복사전재하는 것을 금합니다


* 2020년 제주 지역혁신 싱크탱크 협의체(CIRI) 아카이브 북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 완성본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http://www.jccei.kr/archive/community.htm?act=view&seq=7599



기획 지역혁신팀 이경호최소영

제작 더스토리B

 

편집 이다혜배주희 

사진 이성근

일러스트·디자인 고경훈

교정·교열 박혜강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시대, 로컬의 가까운 미래 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