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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커넥트 Dec 26. 2020

로컬 커뮤니티 전성시대

‘로컬 커뮤니티’는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고 측정할 수 있는 대안적 단위다.


먼저 ‘지역 공동체’라는 한자어 대신 ‘로컬 커뮤니티’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겠다. ‘지역’은 ‘로컬’의 의미를 담은 말이 아니고, ‘공동체’ 또한 ‘커뮤니티’와는 의미가 상당히 다른 말이며, 그 차이점이 이 칼럼의 논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이란 그저 일정한 면적의 땅덩이라는 뜻 이상을 담고 있지 않고, 광역 단위에 해당하는 공간인 ‘리저널(regional)’을 뜻할 때도 많다. 반면 ‘로컬’이라는 말은 ‘개개인에게 있어 대면적·인격적 관계가 가능할 정도의 좁은 공간’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삶이 깃드는장소(place)’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개인적으로는 ‘마을’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생각한다. ‘공동체’라는 말 또한 집단의 이익과 규칙이 모든 성원을 규제하고 지배하는 한 덩어리의 집단이라는 전근대적인 어감을 강하게 담고 있지만 ‘커뮤니티’, 그리고 그 어원이 되는 중세 북부 이탈리아 도시의 ‘코뮤네’는 오히려 ‘개인이 삶의 과정과 거기에 수반되는 유무형의 자원을 공유하는 능동적·수평적 집단’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깔려 있다.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논지는 바로 이러한 ‘지역 공동체’가 아닌 ‘로컬 커뮤니티’, 즉 ‘사람들이 수평적이고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개인적·집단적 삶에 필요한 다양한것을 조달하는 단위’야말로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고 측정하는 데 있어 시장경제의 전횡을 대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가치의 개념, 시장경제 가치의 개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로컬 커뮤니티’, 즉 ‘사람들이 수평적이고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개인적·집단적 삶에 필요한 다양한것을 조달하는 단위’야말로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고 측정하는 데 있어
 시장경제의 전횡을 대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사회적 가치와

시장 가치


시장 근본주의와 유일주의에 침윤된 현대 경제학은 사회적 가치와 시장 가치를 잘 구별하지 않으며, 후자가 전자를 측정하는 최상의, 유일의 지표라고 바라본다. 하지만 전자는 분명히 후자에 선행하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후자로 만족스럽게 측정되는 것도 전혀 아니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사회적 필요의 개념을 정의해보자. ‘개인과 집단의 ‘좋은 삶’에 필요한 유무형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개인의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에서 시작해 문화생활을 누리고, 만족스러운 인생 주기를 완결하는 데 필요한 교육, 의료, 노후 등 무수한 것들이 포함될 것이며, 이뿐만 아니라 개인 삶의 차원을 넘어서서 집단의 ‘좋은 삶’에 필요한 것들, 즉 맑은 공기와 안전한 치안, 쾌적하고 친환경적인 교통 시설 등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지가지의 사회적 필요 요소는 모두 크기가 동일하지 않고 들쭉날쭉할 것이다. 각각의 필요가 개인적·집단적 삶에서 차지하는 다양한 의미와 역할에 따라 전혀 다른 위치를 갖게 되지만, 그 다양한 것들 사이에 일정한 등가 관계를 설정하고 상대가격 혹은 교환 비율을 산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것이 사회적 가치의 개념이다. 


하지만 막상 후자를 정확히 잡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시장 근본주의 경제학의 논리가 등장한다. 오로지 시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가 흥정을 통해 합의한 시장가격만이 해법이라는 것이다. 서로의 이익이 상반되기 마련인 구매자와 판매자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에 합의한다는 것은 곧 그것의 사회적 필요와 사회적 가치에 대해 각자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최대 정보를 동원해 조사한 결과가 될 것이며, 마치 변호사와 검사가 각자 유리한 모든 정보를 동원한 상태에서 판사가 최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시장에서 산출된 가격이야말로 ‘모비딕’처럼 실체를 잡아내기 힘든 사회적 가치를 가장 근접하게 포착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러한 경제학의 주장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 모든 시장에는 엄청난 권력적 불평등이 작동하며, 시장가격은 그러한 불평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에 결코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했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임금으로, 또 라이더의 시간당·건당 임금으로 통용되는 시장가격을 생각해보라. 하청을 준 재벌 기업에 ‘후려침’을 당해온 ‘협력 업체’들의 상품 가격을 생각해보라. 이는 사회적 필요나 사회적 가치를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개발자, 라이더, 협력 업체가 처해 있는 불리한 위치를 표현한 수치라고 보는 것이 옳다. 둘째, 시장에서의 상품 거래라는 방법으로 조달되지 않는 사회적 필요나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수치를 산정할 방법이 없다. 지금 전 세계의 무수한 지식 노동자들은 위키피디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달리 상품 거래 형태를 띠지 않는 위키피디아가 얼마나 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는 알아볼 방법이 마땅치 않다.


로컬 커뮤니티의 가능성: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필요와 가치를 찾아낸다


특히 올해 코로나 위기를 거치면서 앞서 말한 시장경제의 두 가지 결함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첫째, 노동 시장과 중소 상공인 업종의 시장이 극심한 불안정을 겪으면서 권력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에 시장가격이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둘째, 코로나 사태로 인한 종래의 사회적 작동이 근본적·전면적으로 교란되면서 시장경제에서 상품으로 조달할 수 없는 종류의 새로운 사회적 필요가 사방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20년 2월 이후의 급변한 상황에서 시장경제는 사회적 필요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으며, 거기에 합리적인 가격을 붙이는 기능도 잘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큰 폭의 만성적 실업과 경기 침체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서두에 이야기한 의미의 ‘로컬 커뮤니티’의 뜻을 음미해보자.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으며 삶을 함께하는 이들이라면, 그 관계의 맥락 속에서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에 대해 직접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하철 무료 승차를 이용한 노인 택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현재와 같은 ‘플랫폼 영리 기업’의 형태로 조직된 상태에서는 서울 성산동에서 혜화동으로 물건을 보내기 위해 망원동에 사는 노인이 삼각형으로 서울을 한 바퀴 돌아야 하며, 상당한 액수의 수수료를 플랫폼 기업에 내야 한다. 그 대신 성산동에서 노인 택배 일을 하고자 하는 노인들을 마을 플랫폼으로 조직하면 어떨까. 노인들은 성산동과 혜화동만 오가면 되므로 동선이 줄어들며,

수수료로 내야 하는 액수 역시 대폭 줄어들 것이고, 성산동 주민들이 서로 만나고 알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노인 택배 또한 성산동 ‘로컬 커뮤니티’의 맥락으로 자연스럽게 묻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로컬 커뮤니티’는 이렇게 만사 만물을 상품 거래의 관계로 조직하게 되어 있는, 시장경제로는 제대로 발견하기도 힘든 사회적 필요와 그 사회적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보고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삶의 친근한 일부로 자리 잡은 ‘당근마켓’이라는 앱은 이러한 ‘로컬 커뮤니티’의 기능에 착목한 예라고 생각된다. 중고품을 사고파는 앱과 플랫폼은 그 밖에도 많지만, ‘당근마켓’에는 분명히 기존 것에는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가 바로 21세기의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경제 질서를 만들어나갈 맹아라고 믿는다.


기억하자. ‘나와 우리의 ‘좋은 삶’에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함께 조달할 것인가’야말로 ‘로컬 커뮤니티’의 본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조달하는 데 소요되는 인간적·자연적 희생과 비용을 인간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정당하게 평가하고 찾아내는 일로 확대할 수 있다. ‘당근마켓’ 같은 영리기업이 거둔 성공은 그러한 잠재력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좋은 삶’에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함께 조달할 것인가’야말로
 ‘로컬 커뮤니티’의 본색이라고 할 수 있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KPIA) 연구위원장과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팟캐스트 ‘홍기빈의 이야기로 풀어보는 거대한 전환’을 진행했으며,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기본소득 시대>, <코로나 사피엔스>,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등을 썼으며, 옮긴 책으로 <카를 마르크스>(제59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 수상) 등이 있다.


기획 및 발행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제작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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