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심 산지천변에는 제주의 오랜 이야기를 담은 공간들이 있다. 지역의 오랜 문화예술적 맥락을 상징하는 터줏대감 격 공간부터 제주를 주제로 한 콘텐츠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공간들까지 즐비하다. 제주 성 안 가장 큰 식수원 중 하나이자, 빨래터였던 이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제주 문화의 중심지였다. 산지천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원도심의 신-구 문화적 맥락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옛 이야기 간직한 제주식 고택
제주의 전통 주택형태인 안거리(집 안의 큰 주택)와 밖거리(작은 주택), 문간거리(이문간: 주택의 대문이 설치된 건물)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고용준이 지은 근대 건축물로 기술적으로는 일식건물을 참고했지만, 기능적으로는 제주 민가의 전통을 따라 지은 과도기적 건축물이다.
올레(거리에서 주택으로 진입하기 위한 진입로)에 접한 문간거리와 밖거리를 안쪽의 안거리와 따로 지어 마주 보게 놓았고, 그 사이에 마당을 만들었다. 그밖에도 상방, 큰구들, 정지, 고팡 등이 제주 민가의 전통 배치 방식대로 지어졌다. 그러면서도 과도기 유산물답게 일본식 집 구조를 품고 있다.
제주의 역사를 품은 이 고택은 한때 철거 위기까지 처했었지만, 지역 주민들과 시민 단체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넘겼다. 현재는 복원 공사를 마치고 잔디 깔린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는 제주도민의 다양한 모임 장소인 사랑방으로, 밖거리는 제주 책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코로나19가 기승이던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제주책방과 사랑방은 휴관이었다. 4월 1일부터 재개관하며, 지역민들과 제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특히 제주책방에서는 제주에서 발간되는 다양한 서적을 볼 수 있다. 여행 정보는 물론이고 역사, 문화, 자연환경까지 제주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공간적 맥락부터 깊이 있는 이야기까지, 제주를 시작하고 마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 볼 수 있다.
시간의 덕(德) 담긴 원도심 2대째
오랜 장소에는 덕이 붙는다. 다양한 사연과 군상이 오간 기억이 장소에 고스란히 배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50주년 기록전시를 한 대동호텔의 역사는 이제 50년을 넘어 100년을 향해 간다. 대동은 수많은 럭셔리 호텔과 숙박업소들이 각축을 벌이는 제주에서도 특별한 빛을 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유서 깊은 호텔을 찾을 때는 신축의 럭셔리 호텔과 다른 매력이 있다. 개발의 바람을 타는 대신 있던 곳을 윤기나게 가꾸는 곳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박용철·강정자 부부의 손길이 담긴 고즈넉한 로비와 온전히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객실, 고풍스럽고 차분한 가구와 조명 등이 대동의 오랜 품격을 대변한다.
지금의 대동은 제주를 가장 잘 아는 건축가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한 김석윤 건축가가 2001년 설계한 작품이다. 제주와 대동의 문화적 맥락을 잘 이해하는 건축가가 대동의 오랜 호흡을 담아, 화려함 대신 맞춤한 듯 물색있게 대동을 현대화했다.
대동은 또한 단순 숙박업소가 아니었다. 창립자인 박용철 씨는 1960년대 초 예술가들이 모여 차를 즐기던 ‘청탑다방’을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예술을 사랑하는 부모의 뜻을 따라, 박은희 대표는 고민 끝에 지난 2012년 호텔 한 켠에 갤러리를 열었다. 대동호텔의 문화예술적 맥락을 담은 비아아트의 시작이다.
과거 아버지의 청탑다방이 그랬듯, 박은희 대표의 비아아트 또한 제주의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장소로 거듭났다. 특색있는 비아아트만의 전시는 물론이고, 아트페어를 해마다 주최해오기도 했다. 비아아트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다. 비아아트의 첫 전시 작가인 김안식 사진가의 <기억의 가지치기 Ⅱ>가 7~9월 사이 있을 예정이다.
켜켜이 쌓인 각자의 기억이 담긴 호텔은 그 자체로 특별한 제주의 콘텐츠다. 예술인들의 추억과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찾은 신혼부부가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던 기억이 대동에 배어 있다.
해발 0m에서 출발하는 제주 트레킹
한라산 자락에서 발원해 흐르는 산지천은 제주 시내를 관통한다. 산지천 하구에는 산지포구라는 항구가 있었다. 포구의 역사는 자그마치 2000여 년을 넘나든다. 공항이 생기기 전 과거 제주의 출입을 담당하던 곳이다.
제로포인트트레일(이하 ZPT)의 본사는 바로 이, 산지포구가 있던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을 무동력으로 온전히 오르기 위해서는 해발 0m인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제격이라고 ZPT 유아람 대표는 생각했다.
해발 0m를 출발해 ‘Sea to Summit’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경험, ZPT가 가진 매력이다. ZPT는 제주를 걷고 달려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트레킹 베이스캠프를 지향한다. 프로그램 참가자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수행하며, 동시에 여행자들을 위한 카페 ‘제로스테이션’도 운영하고 있다. ZPT가 직접 개발 제작한 굿즈를 판매하며, 특히 제주스러운 원료로 만든 특제 시그니처 음료 ‘제로포인트트레일’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피로회복에 도움을 주는 에너지 음료로 여행객과 트레커들의 지친 발에 활기를 돋울 것이다.
제주의 자연을 느끼기 위한 시작점인 만큼 친환경 공간이기도 하다. ZPT는 친환경 캠페인 “Leave no nothing(의미 있는 흔적을 남겨라)”을 진행하고 있다. 카페의 모든 일회용품은 생분해성 친환경적 공정으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며, 여행지에서 버려진 쓰레기를 수거할 수 있는 생분해 봉투를 무상으로 배포한다.
ZPT는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던 오랜 포구와 새롭게 단장하는 산지천변을 둘러보기 위한 베이스캠프이기도 하다. 꼭 트레킹을 하지 않더라도 일부러 찾아가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과거의 바람이 새로운 바람으로
바람 많은 제주의 기상을 관측하던 곳에 W360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과거 제주성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근래에는 제주지방기상청이,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모여 별자리를 관측하고 북극성을 바라보며 세운을 기원하던 정자 ‘공신정’이 있었다. 지금도 W360이 위치한 호젓한 골목사이 언덕을 오르면 원도심과 탑동은 물론이고 바다, 한라산까지 조망되는 경치가 볼만하다.
기상과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 현재는 혁신 창업거점으로 거듭났다. W360이라는 이름에는 지역의 역사와 공간의 지향점이 담겨 있다. W360의 W는 ‘Wind(제주의 새로운 바람이 부는 곳)’ ‘Watch(서로 연결돼 세상을 바라보는 곳)’ ‘Wish(사람들의 꿈이 이뤄지는 곳)’의 의미를 담고, 360은 ‘한계를 두지 않고 360°로 세상을 바라보다’라는 의미를 담았다. W360은 혁신 창업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특히 테크 분야 육성을 위해 관련 스타트업 또한 매년 입주시키고 있다.
내부 공간 이름 또한 장소가 가진 의미를 담았다. 각 공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원도심 칠성로 이름의 모티브가 된 북두칠성과 나란히 항상 높은 하늘에서 빛나는 W 모양의 별자리 카시오페이아를 구성하는 별들의 이름으로 지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앱실론으로 이름을 지어 이곳을 이용하는 창업자들의 성장을 기원하고 있다.
W360은 창업자를 위한 공간이지만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언제든 누구나 공간을 방문할 수 있고, 상주하고 있는 커뮤니티 매니저에게 센터 프로그램과 시설 이용에 대해 문의할 수 있다. 산지천을 따라 원도심 투어 중에 오거나, 올레길 18코스를 걷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러도 좋다. ‘바람’을 담은 곳답게 W360 옥상의 바람은 유독 달고 청량하다. 1층의 W-SPACE에서는 무료 커피도 내려 먹을 수 있다. 과거의 바람이 새로운 바람으로 연결되는 곳, W360에 담긴 맥락을 이해하고 방문하면 공간이 더욱 새롭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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