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로 가는 관문 ‘제주’
제주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주와 꽤 관련이 깊은 곳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창조신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많은 우주산업 기업들이 로켓 발사와 지상국 최적지로 제주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제 제주와 우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글. 고미 제민일보 선임기자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아마도 사막에서 바라보는 별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별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가는 걸음의 방향은 달라질 겁니다. 사막에서 변치 않는 별자리를 보며 걷는 것처럼 우리도 변치 않는 진리, 변치 않는 빛을 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또한 어떤 별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 한동일 교수가 쓴 《믿는 인간에 대하여》의 한 구절이다. 지난 7월 12일 인류가 만든 가장 강력한 우주망원경인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WST·이하 웹 망원경)’이 꺼내놓은 우주 가장 깊숙한 곳을 엿보고 책을 뒤져 찾았다.
46억 광년 너머 은하단은 지난해 12월 25일 웹 망원경이 우주를 향해 발사된 지 정확히 200일째 되는 날 공개됐다. 웹 망원경이 본 풍경을 마주하고는 그저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런 흥분을 가능하게 한 71세 여성 과학자의 이력에 숨이 멎었다.
망원경의 핵심 장비인 근적외선 카메라(NIRCam)를 담당한 사람은 71세의 여성 과학자 마르시아 리케 애리조나대 교수다. 어린 시절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천문학에 빠진 그녀는 중학생 시절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첫 망원경을 마련했고 지금까지 한길을 걸어왔다. 그와 관련한 일화 중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필요가 있다. 열정을 찾고 그것에 도전하라’는 조언이 가장 도움이 됐다는 인터뷰를 잊을 수 없다. 직접 우주에 가지는 않았지만 이미 우주 안에 있는 그의 행보가, 생각이, 방향성이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제주에서 우주산업이 꿈틀거리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는다.
별을 보며 도전의 영역을 확대하다
제주에서 별은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처음 제주가 만들어지고 사람이 살았던 신화에는 어김없이 우주(하늘)와 해·달, 별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먼저 해상왕국을 이룬 탐라왕국의 뒷배 역시 달과 별이다.
탐라왕국은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섬이기보다는 세상을 향해 열린 문이기를 선택했다. 말에 그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 있는 나라들이 다른 나라로 갈 때 반드시 탐라의 땅을 밟게 했다. 먼저 별을 읽고 바닷길을 냈다. 날씨 변수는 물론이고 망망대해에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 옛 제주 사람들은 달이 차고 또 기우는 위상(문페이즈·moon phase)을 파악하고 별자리의 변화를 읽는 것으로 항로를 가늠했다. 늘 제자리를 지키는 북극성을 숭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목숨을 걸 만큼 극한의 도전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새삼 알게 된 것은, 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지만, 미세한 차이가 확연히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별을 볼 줄 아는 것이 힘이었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은 그렇게 모은 정보가 힘이 되는 세상이 됐다. 옛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경험했던 것들은 과학적 검증을 거치며 새로운 학문과 지식으로 거듭났다.
‘별’ 그리고 ‘우주’를 품은 제주
별을 보는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제주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와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만 관측되는 ‘노인성(老人星, Canopus)’ 얘기다. 노인성은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은 별이며 크기는 태양의 70배 정도 된다. 남극노인성, 수성, 카노푸스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이 별은 고도가 낮아 관측하기 힘들다. 1년 중 동지 무렵 남쪽 수평선 근처에서 잠깐 허용되는 기회를 얻는 것을 큰 운으로 생각했다. 옛사람들은 노인성이 뜨면 나라가 평화로워지고 별을 본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무병장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노인의 의미가 지금과 다르다는 점도 살펴볼 부분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인간에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수는 하늘이 결정하는 문제이며 오래 살지 않으면 착한 일을 할 기회도, 지혜를 닦을 기회도 사라진다고 여겼다. 오래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완성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이 별을 인간 최고의 가치인 ‘수명’을 부여하고 있는 ‘노인’이라고 불렀다. 노인성과 관련한 이야기는 탐라왕국과 연결해서도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탐라와 신라가 교류를 시작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림의 하늘에 빛난 별이 막 뜨고 난 뒤에 탐진 바닷가에 배 한 척이 닿았네. 흡사 노인성이 북두성을 뵙듯이 이때부터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네(星芒初洞雞林天 已艤耽津一葉船 恰似老人朝北斗 從今始與通人烟).”
노인은 남쪽 하늘의 노인성을, 북두는 북쪽 하늘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의미한다. 풀이하면 남쪽의 탐라가 북쪽의 신라를 찾아온 일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제주목사(제주 최고 행정관)로 발령받으면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가 노인성을 보는 것이었다. 전국을 유람했던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도 노인성을 보려고 제주를 세 번이나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당시 국가 차원에서 노인성에 관한 제를 지내고 과거시험 주제로 노인성이 나왔다는 자료도 여럿 있다.
조선 후기 제작돼 ‘코스모그래피(우주지, Cosmography)’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천하총도(천하도)〉의 세계관 속에도 제주는 빠지지 않는다. 제주는 ‘영주(瀛州)’라고도 불린다. 세계를 두르고 있는 관념상의 큰 바다를 영(瀛)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지구를 담아낸 천하총도의 가장 바깥쪽 둥근 원을 ‘영(瀛)’이라 칭했던 것은 영주라는 이름과 무관하지 않다.
천지창조 신화를 품은 섬
‘별’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더라도 제주는 그대로 우주이기도 하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구분 없이 맞붙어 깜깜한 어둠의 덩어리만 있었다. 어느덧 때가 무르익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늘머리가 고개를 들고 땅의 기운이 다리를 내리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생겼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서서히 벌어지더니 시루떡 한 판 떼어내듯 딱 떨어져 나갔다. 그 사이로 산이 불끈불끈 솟아오르고 물이 쿨렁쿨렁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도 여럿 등장하는 ‘그랬다더라’류의 이야기 속에 제주의 천지창조 신화는 특별하다. 〈천지왕본풀이〉로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구체적이고 또 극적이다. 마치 과학자들의 영역에 나오는 빅뱅 우주론과도 맞닿는다. 여기서 끝났으면 ‘우연히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두 개의 달’ 이야기에는 솜털이 서는 느낌이 든다. 지난 2011년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에 수천만 년 전 지구는 두 개의 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 충돌해서 오늘날의 달이 생겨났다는 학설이 발표된다. 천지왕본풀이 중 개벽 이후의 대목을 보자.
“이때 하늘에서는 청(靑)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黑)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수해 만물이 생겨났는데, 먼저 여러 별이 생기고, 다음에 해와 달이 둘씩이나 생겨났다. 이 때문에 낮에는 더워서 살 수 없고, 밤에는 추워서 살 수 없게 됐다. (중략) 소별왕은 결국 대별왕에서 이승의 질서를 바로잡아 달라고 간청하고, 대별왕은 활로 해와 달을 하나씩 쏘아 없애 하나씩만 남긴다.”
삶과 죽음, 내세와 현세, 이승과 저승의 경계도 현재형이다. 다름 아닌 돌담이다. 한라산 허리를 휘휘 돌아 2만 2,000㎞에 이른다는 흑룡만리(黑龍萬里)는 돌담이자 영혼의 길을 상징한다. 그마저도 각각의 영역이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고, 연결됐다고 인식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오름을 타고, 초가지붕을 따라 흐르는 나긋한 선 역시 지구 대기권 밖의 천체와 닮았다.
잘 짜인 각본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일이, 미쳐 헤아리지 못할 시간을 건너 앞으로 나아간다. 꿈같던 일에 도전하는 사람과 의지가 제주와 닿아 인(人)과 연(然)을 만든다. 이른바 ‘뉴 스페이스’다. 꿈과 기술은 물론,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낼 통찰력까지 제주라는 섬의 흡인력은 무한하다.
무슨 영화 같은 얘기냐고 묻는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신화다. 적어도 하늘을 볼 줄 알았던 사람들의 지혜가 누적된 땅, 제주에서 사람들 살면서 쌓아온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단어면 충분하다. 그리고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대목을 옮겨와 펼친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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