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김영태 교수
팁스(TIPS, 민간주도형 기술창업지원 프로그램)가 도입된 배경과 우리 창업생태계에서 갖는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김영태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를 만났다. 그는 1998년 중소기업청 창업지원과 사무관을 시작으로 지난 25년여간 공직자로서, 연구자로서 대한민국의 창업생태계와 인연을 맺어왔다. 특히 2011년 이스라엘에 중소기업청 파견관으로 나가 있을 당시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팅(TI) 모델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면서 팁스의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팁스가 도입된 지 올해로 10년째. 팁스의 역사와 함께해 온 그는 이번 제주와 팁스의 만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10년 창업생태계의 변화와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보면서 팁스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우리나라 벤처산업 1세대로서 그동안 스타트업, 창업 관련 이력도 많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국제 경제학, 행정학 석사를 수료하고 행정고시를 패스한 이후 중소기업청 소속으로 발령받은 첫 보직이 벤처기업국 창업지원과 사무관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들이 성공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벤처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는데요. 우리나라도 1996년에 중소기업청을 출범하면서 벤처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소기업청은 단순히 KS 인증이나 관리에 집중하는 실행 부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입사한 1998년쯤부터 영향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어요. 1997년의 IMF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가 중소기업청을 벤처기업 육성 전담 부처로 삼게 된 것이지요. 그때부터 중소기업청 벤처창업 파트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정책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벤처투자과장도 하고, 중소기업비서관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에는 중소벤처기업부 국장으로 있었어요. 이스라엘의 창업지원 모델을 이식한 팁스를 제안하고 도입한 것도 이스라엘 파견관 시절입니다.
국내에는 생소한 이스라엘의 창업지원 모델을 제안하셨는데요, 어떤 과정으로 팁스가 도입되었나요?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벤처 생태계는 단연 실리콘밸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자가 이스라엘이었어요. 애초에 이스라엘의 창업지원 프로그램인 TIP(Technological Incubators Program)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저 공간 제공 중심의 미국식 지원 프로그램과 다른 형태의 지원 프로그램은 뭐가 있나 궁금해서 조사하던 와중에 이스라엘 사례를 알게 되었고, 이 방식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당시 이스라엘에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쏟아진 수많은 숙련 과학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그들의 기술을 사업화하는 방법을 고안하는데요. 이게 TIP입니다. 우리나라와는 도입 배경이나 생태계 자체가 다르지만, 조금만 손보면 충분히 매력적인 모델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입을 추진했습니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1,634개 기업이 팁스에 선정되었고 총 1만 1,443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나라 벤처 투자 생태계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을까요?
일단 민간 주도의 투자 방법이 정착되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팁스가 필요한 이유는 민간 주도의 투자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팁스가 도입되기 이전 우리나라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벤처 투자를 끌어나가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효율적인 투자가 힘들어요. 리스크도 큽니다. 정부가 지원한 벤처기업이라도 100% 모두 성공할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니까요. 그래서 불확실성이 크고 변화가 빠른 시장에서 민간이 먼저 경쟁력 있는 벤처기업을 선정해 투자하고, 정부의 지원은 그 뒤를 따르는 방식이 정착되어야 해요. 저는 벤처 투자의 키는 결국 민간이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톱-다운 방식이 아닌, 바텀-업 방식의 투자 생태계를 조성하는 첫 시도가 팁스인 거죠.
팁스의 모델이 된 이스라엘의 방식과 팁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정부의 스탠스 차이입니다. 이스라엘은 전형적인 ‘히트 앤드 런’ 방식의 투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시장의 불확실성을 정부가 리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스라엘 정부는 시장이 위험을 먼저 감수하고, 추후에 시장의 선택으로 살아남은 벤처기업에 과감하게 지원해주는 식으로 정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민간 투자자의 지분을 50% 미만으로 제한하는 규정, 4년 단위로 투자 운영권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 등 민간이 도약할 때까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즉 말 그대로 정부는 마중물만 제공하고 치고 빠지는 정책 철학이 잘 실행되고 있어요. 자신들의 경제 규모에 따라 인큐베이터도 딱 26개만 운영하면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정부의 역할이 투자 생태계에 많이 남아 있어요. 팁스로 인해 민간 개방이 많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죠. 정부와 시장 간의 역할 재정립과 보완이 필요합니다.
민간 주도 투자 생태계나 팁스가 더욱 확실하게 정착하기 위한 다음 스텝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은 우리의 스타트업 생태계와 위치를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부가 벤처 생태계에서 어떤 정도로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예컨대, 정부 지원은 어떤 단계에 어떤 방식이 가장 적합한가, 정부 지원의 효과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과연 한국의 경제 규모에 어울리는 운영사 개수는 몇 개인가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합니다. 아직은 팁스가 스타트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이러한 기준이나 규제, 적절한 정부의 역할 등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편이에요. 이 부분은 장기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법안을 마련하고, 제도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보다 심도 있고, 전방위적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합니다.
팁스를 준비 중인, 혹은 팁스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에 조언해 주신다면?
기업가 정신에 투철하라는 조언을 건네고 싶습니다. 사업은 팁스에 선정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팁스는 어디까지나 ‘지원’에 불과해요. 팁스의 지원 여부와 관계없이 사업성은 뛰어나야 합니다. 팁스에 선정되기 위해 사업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만의 사업 모델을 만들고, 투자자가 매력을 느낄 만큼 실력을 키우면 팁스가 아니더라도 투자는 들어옵니다. 지원 없이 유지되지 못하는 사업은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한 사업입니다. 그리고 팁스라고 해서 무작정 지원받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운영사도 스타트업을 평가하지만, 스타트업도 운영사를 평가해야 해요. 자신의 사업 방향과 팁스 운영사의 비전이 같은지, 운영사가 최근에 성공시킨 다른 스타트업은 있는지, 우리의 사업 모델을 명확히 알고 있는지 등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스타트업과 운영사가 서로 평가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파트너를 찾는 것. 그것이 팁스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제주 지역 창업생태계의 발전을 위한 제언이 궁금합니다. 교수님께서 평가하시는 제주 창업생태계의 장단점이 있다면 답변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제주 지역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창업생태계를 5~6년 이상 지켜봤습니다. 일단 제주의 가장 큰 장점은 공간 그 자체에 있습니다. 제주는 누구나 인정하는 관광 명소입니다. 글로벌 인구가 한데 모이는 장소이고, 휴식과 힐링을 위한 핫 플레이스로 널리 알려져 있죠. 신재생 에너지와 기후 위기 대응 등 첨단 기술을 테스트하기 좋은 환경이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글로벌 마켓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스\타트업이 성장하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장소이기에 그만큼 대중적인 의견을 수렴하기 좋아 대중 친화적인 사업도 가능합니다. 게다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와의 거리도 멀지 않아 글로벌 사업을 시작하기에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제주는 한반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문화와 폐쇄성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독특한 문화를 잘 발전시키면 개성이 될 수 있지만, 그 개성이 지나치면 폐쇄적인 특성이 발현될 수 있습니다. 제주만의 특별함을 유지하면서 대중성에도 부합하는 탁월한 균형 감각이 필요한, 쉽지 않은 생태계이지만 글로벌 성장 잠재력이 풍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제주 최초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팁스’ 운영사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교수님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육지의 운영사들과 다른 차별적이면서 제주의 강점을 활용하는 방법을 기술이라 보고 팁스 운영사를 자처한 것 같은데요. 일단 방향 자체는 맞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제주에 본격적인 기술 기반 대학이 없기 때문에 관련 연구기관이나 다른 육지의 대학들과의 연계가 중요해 보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이 팁스 하나로 당장 제주에 기술 스타트업이 뿌리내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주에 기술 기반 스타트업이 자라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팁스가 잘 운영되어도 성장이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팁스뿐 아니라 제주 지역 전체에 스타트업 커뮤니티 활동이 활성화되고, 지역의 젊은이들이 스타트업을 고민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팁스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팁스가 한국에 새로운 지원 프로그램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팁스에 기대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부는 어디까지나 마중물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기업은 고객의 통점(pain point)을 찾아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팁스만을 바라보며 사업을 진행하고, 팁스에 선정된 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이어 나가면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모두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팁스가 수많은 기술 인력에 약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은 지원으로 끝내고 기업은 기업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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