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글쓰기 책과 강연에서 한 목소리로 외치는 글쓰기 첫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당장 써라!'죠. 비슷한 버전으론 '매일 써라!', '무조건 써라!', '한 줄이라도 써라!'가 있고요. 은유적 표현으론
'글은 엉덩이의 힘으로 쓴다.', '내 글의 8할은 의자 덕분이다.' 등이 있답니다.
그렇죠! 일단 뭐라도 써야 그걸 고쳐보고 바꿔보고 해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겠죠. 반박할 수 없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근데 솔직히 이 말, 마음에 팍 와 닿나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마치 수능 만점자에게 '공부 잘하는 비법이 뭐예요?' 물었더니 '매일, 최대한 오래 책상에 앉아있는 거죠."같은 뭐, 들으나마나 한 답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 '지금 당장 써라!'가 진리의 말씀인 거 같긴 한데 조금도 나를 흔들지 못할까요? 그건 우리가 이미 이걸 해봤기 때문입니다. 일기를 쓰려고,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소설 창작을 해보려고 노트를 펴거나, 한굴 프로그램을 열거나, 블로그 쓰기 버튼을 클릭했었거든요.
그런데 하얀 바탕처럼 머리 속도 하얘져서 도무지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곤 했죠. 아니면 글을 조금 써보긴 했는데 영 아닌 것 같아 지우고 또 지우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거나요. 이미 우리 모두 당장 써보려고 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써라!'라는 말이 울림을 주지 못하는 거죠.
그래도 한번 더 지금 당장 써볼까요? 아니요. 안됩니다! 당장 쓰지 말고 무엇을 쓸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더 친절히 말씀드리자면 내가 잘 쓸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중에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제주아빠에겐 10살 된 딸이 있는데요. 작년 여름방학 때 학교에서 일기 쓰기 숙제를 내줬거든요. 그래서 먼저 컴퓨터로 일기를 쓴 다음 아빠랑 같이 한번 보고 나서 일기장에 옮겨 적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처음 며칠 동안 일기 쓰라고 방에 들여보내면 한 3분쯤 있다 여지없이 이렇게 물어보곤 하더라고요.
"아빠, 근데 뭐 써?"
일기를 쓰려면 그날 있었던 일 중 재밌었던, 속상했던, 설렜던, 이상했던, 놀랐던, 힘들었던, 뭐 그런 가슴 뛰는 또는 마음에 남은 순간들을 먼저 떠올려본 후 그중 한 가지를 정해 써야 하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쓸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 무작정 쓰려고 하니까 첫 줄도 시작하지 못했던 거죠.
블로그에 연재하거나, 에세이를 시작하거나, 책 집필에 도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무얼 쓸지를 먼저 정해야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얘기 한번 써볼까?'하는 즉흥적인 결정 보단 내가 잘 쓸 수 있는 주제는 뭔지 한번 다 적어본 후 그중 내가 당장 쓰고 싶은 이야기는 또 뭔지 하나씩 골라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잘 쓸 수 있는 주제가 없다고요? 아니요. 분명히 있습니다. 제 지갑에 있는 전 재산 1만 8천 원, 몽땅 겁니다.
나는 자전거 타는 게 취미다. 그럼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에 대해선 다른 사람보다 분명 잘 쓸 수 있겠죠? 나는 남편을 꽉 잡고 산다. 그러면 <남편 길들이는 방법>에 대해선 꽤 쓸 얘기가 많겠죠? 나는 치킨 배달을 10년 동안 했다. 그럼 <배달 고수로 등극하기>에 대해선 노하우가 마구 쌓여있겠죠?
이렇듯 내가 잘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반드시 있습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걸 찾아보지 않고 자꾸 남들이 써놓은 주제만 바라봅니다. 맛집 리뷰 작성하고 여행기도 써보고 요리 레시피도 올려보는 거죠. 그렇게 몇 번 해봤는데 생각보다 글쓰기가 힘들고 글 하나 올리는데 시간도 많이 들고 반응도 별로 없다 보니 결국 어느새 그만두게 됩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이야기가 약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아닙니다. 내가 잘 쓸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기하게 된 겁니다.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밤새라도 쓰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내면 내 글쓰기, 분명 달라집니다.
다만 글의 주제를 확! 좁혀보세요. 아기 엄마니까 '육아'에 대해 한번 써볼까. 좋습니다. 그런데 이미 육아에 관한 글들이 세상에 넘쳐나잖아요. 그 안에서 육아 이야기가 빛을 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직 나만 알고 있는 그리고 내가 신나서 쓸 수 있는 육아 이야기, 그걸 찾아내야 합니다.
아들만 둘인데 맨날 치고받고 싸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더니 둘 사이가 이젠 너무 좋아졌다. 요 노하우,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그럼 그 이야기를 써보는 거죠. <사이좋은 형제로 키우는 육아법>.
여행을 좋아하니 여행에 대해 써보려 한다고요? 네. 대신 나만 쓸 수 있고 쓰는 내내 행복할 여행 글은 뭘까? 먼저 생각해 보자고요. 물론 남들처럼 여행지 소개와 감상 글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여행작가들과 글쟁이들이 여행 에세이 하나 가득 쓰고 있잖아요. 그들보다 멋진 여행 이야기, 써 내려가실 수 있으세요?
아니라면 다시 찾아보자고요. 나만의 여행 글감을. 만약 여행 갈 때마다 미리 그 지역의 독특한 기념품들을 검색해 꼭 사 오곤 한다면 <내 마음을 흔든 그 도시의 기념품> 이야기 써보시면 어떨까요? 오직 나만 쓸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고 기념품 사진도 찍어 올릴 수 있느니 당장이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내가 잘 알고 있고 또 꼭 전하고 싶은 글쓰기 주제부터 먼저 찾아보세요. 그리고 찾았다면 그때부턴 세상 모든 글쓰기 책과 강연에서 부르짖는 대로 '당장' 써보는 거죠.
그나저나 그럼 도대체 왜 세상의 모든 작가와 강사들은 이런 얘기는 쏙~ 빼먹고 무조건 '지금 당장 쓰라!'라고 하는 걸까요? 그 사람들 모두 글쓰기가 취미이자 특기이며 직업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을 써야 할까?'가 아닌 '이 많은 이야기 중에서 뭘 먼저 써야 할까?'를 고민하는 종족들인 거죠. 다시 말해 머릿속에 쓸 거리들이 넘쳐나는 사람들이라 '글을 쓰고 싶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쓰면 되지. 뭐가 고민이야?'라고 말하는 거죠.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보통 소설가나 시인이나 작가들이 주로 당장 쓰라고 부르짖곤 합니다. 기자나 여행작가나 평론가라면 보통 그러지 않거든요. 기자라면 기삿거리를 찾아내 취재를 해야 기사를 쓸 수 있으니까요. 여행작가도 여행지를 정해서 실제로 갔다 와야 여행 글을 쓸 수 있고요. 평론가도 영화든 음악이든 일단 보고 들어야 비평을 쓸 수 있거든요. 그러니 '지금 당장 써라!' 그런 말, 섣불리 던지지 않죠.
그에 반해 소설가와 시인은 머릿속 생각만으로도 당장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고 작가들도 보통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기획하고 있으니 당장 쓰라고 부추기는 거랍니다.
자, <제주아빠의 나만의 글쓰기> 그럼 오늘 이야기 정리 한번 들어가 볼까요? "이런 말씀드리면 잘난 척하는 걸로 들리겠지만 저는 아무래 글쓰기 유전자를 타고난 것 같습니다."라든가 "머릿속에 천 가지 이야기가 자기 차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만."같은 내추럴 본 롸이터가 아니라면 당장 쓰지 말고 내가 잘 쓸 수 있고 내가 꼭 쓰고 싶은 주제부터 먼저 찾아낸 후 그때부터 '당장' 써보자고요.
프롤로그 | 글쓰기, 다시 시작해 볼까요?
01. 지금 당장 쓰지 마세요!
02. 독서는 글쓰기 아닌 눈높이 선생님
03. 나만의 글감 찾기 여행
04. 밤새, 매일 쓰고 싶나요?
05. 무얼 써도 칭찬받는 시대
06. 내 글 설계도, 목차가 필요해
07. 글은 올려야 제 맛!
08. 재미가 없으면 독자도 없어요
09. 당신의 글투를 보여주세요
10. 글쓰기는 레고놀이처럼!
11. 바닥난 밑천, 소풍을 떠나요
12. 나만 아는 게 생생한 사례
13. 제목은 힘은 언제나 어마어마!
14. 사전 한번 집필해 보실래요
15. 문체에 정답 같은 건 없어요
16. 글 쓸 땐 작가, 다 쓰면 독자
17. 틀린 맞춤법보다 부끄러운 문장
18. 퇴고, 체크 리스트 확인부터!
19. 지우고 고쳤으면 던져두세요
20. 글 살려주는 고마운 디자인
에필로그 | 나를 위해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