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기억 속 드문드문 남은 푸른 하늘, 빨간 산딸기 그리고 갈색알밤
뒷산에 오른다. 부모님의 언성이 높아질 때면, 인적이 드문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뒷산으로 향했다. 능선을 따라 천천히 오를 수 있지만, 나는 굳이 곧게 뻗은 계단을 택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가파른 길. 벗어나고 싶었다. 오르고 또 올랐다. 마냥 끝을 내고 싶었다. 무엇이 끝인지도 모르는 끝을 상상하며 걸었다. 마치 그 길의 끝 어딘가에 지금의 고통을 벗어날 출구가 있을 것만 같았다.
14살의 나는 ‘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매일을 죽어가는 길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정상이 가까워지면 하늘이 조금씩 열렸다.
끝을 찾아 숨 막히게 걸어 올랐는데 끝은 없었고 또 다른 파란 세상이 펼쳐졌다. 잠시 숨을 돌리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식물들이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모두 다르게 살았다.
나도 다르길 바랐다. 지금과 다른 '나'가 되길 바랐다.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산을 헤집었다. 흐트러진 마음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집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산속을 헤매며 세상을 잊을 수 있을 무언가를 찾아보았다. 산딸기도 따먹고, 밤송이도 까 뒤집었다. 산속에 있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산은 나를 맑고, 투명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던 엄마가 집을 뛰쳐나갔다. 이틀 후, 아버지는 내가 오르던 그 뒷산 어딘가에 숨어 있던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 집으로 끌고 돌아왔다. 그 이틀의 시간은 까맣게 비어 있다.
다만, 집으로 돌아온 엄마의 온몸에 난 상처와 찢어지고 더럽혀진 옷자락만이 선명하다. 밤이 무서웠을까, 아빠가 두려웠을까.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그 산에 오르지 못했다.
엄마가 밤을 지새웠을 자리, 그 흔적을 보게 될까 겁이 났다. 부모님의 끝없는 다툼으로 수많은 시간들이 까맣게 기억되었다. 까만 기억 속 푸른 하늘과 빨간 산딸기 그리고 통통하게 살찐 갈색 알밤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