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가 태어난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오래 헤매며 살아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 두 아이를 키웠다. 아이들만 잘 키우면 된다고 믿었고, 우직하면서도 미련할 만큼 아이들에게 집중했다. 그 시간이 아깝지는 않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전문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심리상담을 1년 동안 받았고, 심리치료에 관한 자격증 공부도 해보았다. 단순한 강의보다 심리코칭, 심리치료사 같은 전문가 과정을 선택했다. 스스로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었다. 사이코드라마와 소시오드라마를 따라다니며 내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했다.
10여 년 전, 제주에 오면서부터는 내 안의 문제를 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했다. 마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 책도 부지런히 읽었고, 객관적인 개념 속에 나를 맡겨보고 싶었다. 타인의 마음을 다루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를 스스로 돌보고 싶어서였다. 6개월 심화 과정의 컬러테라피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나를 바라보았다. 안갯속 숲을 헤매는 기분은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내 고통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원인은 원가족이었다. 남자 형제들과의 차별,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을 수 없었던 지원, 이과로 진학하면 공순이밖에 될 수 없다며 진로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청소년기의 상처들이 촘촘히 붙어 있었다.
아버지와 산에 갔던 기억이 점점이 남아 있다. 마을 끝에 있는 검단산 약수가 좋다며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갔다. 오빠와 남동생은 함께 간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말통을 지고, 나는 2L짜리 물병 2개를 짊어맸다. 힘들게 돌아오면 오빠와 남동생은 집에서 게임을 하며 뒹굴고 있었다. 그때의 차별이 또렷하게 인지했다. 나는 늘 약수터 동행이었다.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며 쉬는 남자 형제들을 바라보며 부당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아버지께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등산 좋잖아. 건강해지고 맛있는 약수도 먹고. 저 자식들은 말 안 듣잖아. 말 잘 듣는 네가 따라가면 되지.”
그 순간 나는 가족이라기보다 집에 있는 부려 먹기 좋은 일꾼 같았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아니라 폭력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 야구선수였던 아버지는 발톱이 빠진 채 한라산을 완주했다며 “한라산도 아닌 뒷산인데 이 정도는 올라갈 수 있지”라며 나를 다그치기만 했다.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가, 내가 귀한 자식이긴 한가’ 하는 의문을 품은 채 자랐다. 내가 감당해야 했던 부당한 일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올라왔다.
내게 까맣게 기억된 시간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기 시작했다. 나를 찾고자 했던 시간의 핵심이 원가족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마음에 위로가 필요했고, 기대고 싶은 곳이 필요했다.
어른이 된 어느 날, 동네 언니들이 산에 한 번 가자고 했다. 별생각 없이 편한 마음으로 산 입구에 도착해 신발끈을 고쳐 묶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겨우 산 중턱쯤 올랐을 때, 갑작스러운 어지럼증과 가슴 통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로는 잊고 있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통증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미진아, 약수터까지 가자.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 순간 발작처럼 몰려온 과호흡이 어린 시절의 차별받은 기억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나는 그날, 약수터까지 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