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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Aug 28. 2024

서귀포에도 음악다방이 있었다

"아~ 전원다방..."

얼마 전 자료 조사차 만났던 사람과 맞장구친 이야기다.

그 사람은 제주에서 음악다방 DJ라면 "아하" 하는 분이다. 한때 음악다방을 하셨거나, 음악다방을 즐겨 찾던 죽돌(순)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름은 모르더라도 훤칠한 키에 장발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사람이다. 제주의 음악다방을 얘기할 때 꼭 들어가야 하는 단어 제주시 "심지다방"에서 DJ도 했었고, 한때 운영을 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자료 조사차 여럿이 함께 그분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만났다.

앉자마자 대각선에 앉아 있는 나를 유심히도 계속 쳐다보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분 자료를 갖고 있었고, 자료조사의 대상이었기에 유심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 제주시의 음악다방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서귀포에서도 음악다방 DJ를 하신 적이 있지 않나요?" 내가 대화 도중에 물었다.

"예, 전원다방이라고 잠깐 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저 기억 나시나요, 전원다방 부지런히 드나들었는데..."
" 아! 아까부터 웬일인지 낯이 익구나 했는데,..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그제야 그분은 의문이 풀린 듯 웃었다.

1980년, 서귀포에 처음 생긴 음악다방인 전원다방의 기억이다.



1980년대 전후 시내에 있는 다방은 대부분 커피를 마시거나 손님을 만나러 어른(중장년)들이 가는 곳, 사업적인 용무를 위해서 가는 곳이었다. 다방에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마담이 있고, 다방레지가 있어서 어른들이 가면 접대도 하고, 옆에 앉아서 시중도 들었다. 돈도 없는 젊은이들이 가면 눈총을 준다고 하는 그런 얘기들이 있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누나를 따라서 가본 다방의 모습도 그랬다. 다방은 우리가 가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제주대학교와 몇 개의 대학이 있는 제주시는 달랐다. 1970년대 초부터 젊은이들을 위한 음악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심지다방, 호수다방, 중앙다방, 대호다방, 칠성다방, 명륜다방.. 한때 제주시 칠성통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제주시 칠성다방, 1980년 제주시에 가면 몇 번 들렸던 곳이다. 지하층에 있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제주어로 귀 눈이 왁왁 이다. 대형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에 가까운 음악 소리는 쿵쿵쾅쾅 심장을 때렸다. 두꺼운 문을 밀면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흐릿한 물체의 윤곽만이 보였다. 테이블마다는 대학생인 듯한 젊은이들이 연신 떠들고 있었고, 어떤 테이블에는 싸움이나 한 듯 각자 플레이로 본숭만숭 제멋대로 퍼져있었다. 당시 내가 경험한 음악다방이라는 곳의 모습이었다. 굉장히 낯선 신문물의 경험이었다.       


1970~1980년대, 서귀포에 젊은이들만을 위한 장소는 없었다. 대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큰 직장도 있는 것도 아니기에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장사할 일은 없었다. 굳이 꼽는다면 잠시 있다가 사라진 음악다방 정도다.

전원다방입구(출처:서귀포시사진db)

1980년 초 서귀포 초원다방 맞은편에 지하가 있는 건물(서귀리 294-20번지)이 들어섰다. 당시에는 꽤 높은 건물로 지하층도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검정색의 웬 커다란 박스가 달렸다. 후에 안일이지만 대형 스피커였다. 앞을 지날 때면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에서 터져 나오는 강력한 베이스의 음악 소리가 우리를 유혹했다. 얼마 후 전원다방이라는 간판이 붙여졌다. 음악다방이라고 했다. 제주시에서 전문 DJ도 온다고 했다. 제주시나 가는 날 구경할 수 있던 음악다방이 드디어 서귀포에도 생긴 것이다.



1980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지금처럼 다양하지가 않았다.


전자기기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지던 시대다. 이런 전자기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으로 불리던 시절, 음악은 카세트테이프나 LP,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게 전부다.


집에 전축이 있어서 LP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전축은 고가일뿐더러 LP판을 구하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할 때 전축이 있는 집을 별도로 조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가장 많은 경우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서 듣는 경우다. 당시 웬만한 가정에는 카세트 라디오는 있었다. 카세트가 아니고 라디오를 위해서다. 당시에는 가수들도 지금과는 달리 신곡을 낼 때 테이프로도 제작했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했고, 휴대도 쉬워서 가장 흔한 방법이었다. 


LP판이나 테이프는 비용에 비해서 가성비가 낮았다. LP나 테이프에는 A, B 면에 10~20여 곡이 담겨있는데, 대표곡 몇 곡을 제외하면 거의 듣지를 않았다. 건전가요도 있고, 예전에 발표한 곡도 있고, 모르는 가수의 노래도 있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레코드 가게에서 자기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녹음하는 방법이었다. 보통 카세트테이프에는 15~20곡 내외가 들어간다.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적어서 레코드 가게에 녹음을 의뢰한다. 당시 인기곡이나 여러 가수의 노래를 원하는 대로 녹음해 주었다. 공테이프 비용+ 약간의 수고비용만 주면 오케이다. 저작권 개념이 별로 없던 시대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얘기다.   

라디오는 KBS AM 방송밖에는 잡히지 않았다. 음악이 많이 나오던 다른 방송이나 FM 방송은 들을 수 없었다. 늦은 밤 신문에서나 읽은 이종환의 디스크 쇼나 별밤을 듣기 위해서 라디오의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던 때가 있었다. 주파수를 맞춰 놓고 잠시 소리가 나오면 부라보를 외치던 일, 잠시 듣고 있노라면 다시 지지직하면서 멀어지는 라디오 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날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이런 어렵디 어려운 음악 청취환경에
음악다방이 생긴 것이다.


음악을 갈구하나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에게 음악다방은 환상 그 자체였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간에서 고출력의 스피커를 통해서 팝송이나 신곡, 희귀한 올드팝까지 모든 음악을 마음대로 골라 들을 수 있는 곳이 생긴 것이다. 가격도 저렴하다. 커피 한 잔, 요구르트 한 잔을 마실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됐다. 자리에 있으면 따뜻한 보리차도 주고, 때에 따라서는 나를 찾는 전화도 연결해 준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했던, 그러나 혹시나 가질 수 있을지 꿈꿔왔던 음악실이 생긴 것이다. 듣고 싶은 노래의 제목만 주면, 전문가인 DJ가 친절하게 설명과 해설을 달아서 음악을 들려주었다. 노래나 가수에 대한 정보 습득이 어려웠던 시절, DJ의 전문적인 해설은 우리의 귀를 뺏어갔다. 


당연히 이곳을 찾는 마니아들이 생겨났다. 이 분위기를 탐닉하고, 이 분위기를 마치 특권인 양 즐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음악다방은 조금 늦게 문을 열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에도 11시쯤 다방으로 출근하고 죽치고 있노라면 유유상종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만난다. 갑자기 친구가 그리울 때, 소주 한잔을 할 수 있는 벗이 그리울 때, 함께 음악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할 때 무턱대고 다방에 들어선다. 이미 익숙한 곳이라 우리 집 거실이나 마찬가지다. "어서 오십시요"하고 반겨주는 종업원은 이때쯤은 누나라고 부른다. 그래야 보리차 한 잔이라도 더 리필해주기 때문이다. 자리를 잡고, 테이블에 있는 음악 신청 용지에 몇 곡을 적고 누나를 부른다. 메모지를 건네주고, 차를 주문하고 안락의자 깊숙이 무슨 고민이 있는 척 어깨를 파묻고 죽치고 앉아 있으면 된다. 커피나 요구르트, 음료수 한 잔을 시키고 몇 시간 있어도 크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누나라고 부르던 종업원이 가끔 두꺼운 잔에 보리차를 리필해주고 가면 고마울 뿐이다. 혼자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성냥개비 쌓는 동안은 무념무상으로 시간만 죽어갔다.



음악다방 죽돌이 생활은 거의 일상이었다. 1주일에 3~4일은 다방을 찾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동명백화점이나 삼일 빌딩 사거리로 가려면 우회해서 거쳐 가야 하는 곳이다. 저녁 시간 약속이면 정오쯤 나가서 다방을 들른다. 들어가면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습관적으로 리궤스트를 한다. 자리를 항상 정해진 구석 자리다. 죽돌이들이 고정자리는 대부분 그렇다.


20대 초반, 감성적이고 뭔가는 삐딱선이 있어야 할 듯한 기분이다. 그래서 주로 들은 음악이 대부분 그런 장르다. sailing(Rod Stewart), Bridged Over Troubled Water(Simon and Garfunkel), The saddist thing (Melanie Safka),  epitaph (King Crimson) , 이미 발표되기는 했으나 다시 국내에서 인기를 끌던 노래들이다. 나중에는 Rod Stewart의 passion이나 Olivia Newton-John의 physical, xanadu와 디스코의 열풍을 일으킨 Bee Gees의 음악을 많이 듣기로 했다.

서귀포에 음악다방은 예전 전화국 앞 지하에 소라다방,
삼일빌딩 가는 길에 금화다방이 있었다.


전원다방은 전형적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음악다방이었던 반면 소라다방(서귀리 293-12번지)은 분위기 자체가 아주 달랐다. 음악다방이라는 표현보다는 음악이 있는 조용한 다방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80대 초반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 소라다방의 위치는 지금 kt 서귀포지점 민원실 맞은편 당시 고외과 건물 지하다. 밖에서 보면 다방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길에서 깊숙이 들어가서 1층 식당의 옆으로 들어가야 한다. 2층에는 당시에 고외과가 있었다. 그러기에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다. 그래서 인지 조용하다. 뮤직박스도 있으나 전문적인 DJ가 있은 것은 아니다. 원하는 음악을 신청하면 종업원이 골라서 들려주는 방식이다. 장소도 그리 크지 않았다.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나 여자를 만나거나 조용한 얘기를 원할 때 찾았다.


여기를 다닐 때가 한창 ELO( The Electric Light Orchestra)가 인기를 끌 때다. Midnight Blue, Xanadu

를 자주 들었다. 특히 여기서 처음 들었던 Midnight Blue의 전주부분은 잊을 수 없다. 존레논의 사망과 동시에 다시 인기를 끌던 피아노 전주가 인상적이던 Imagine도 소라에서 들었던 음악 중의 하나다.


금화다방은 지금 중정로에서 이중섭거리로 들어가는 입구 쪽이다. 삼일빌딩 사거리 CU 바로 위건물 "오락실 올레?"가 있는 건물 지하에 있었다. 음악다방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많고,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넓지막한 공간에 뮤직박스가 있는 정도다. 가끔 삼일빌딩 근처를 갔다가 시간이 날때 친구와 들렸던 기억이 있다. 내가 들었던 음악을 체크해보니 1984년인 것 같다. 여기서는 주로 조용필의 노래를 많이 리퀘스트 했다. 다방을 들어가는 입구에 큰 오락실이 있었다. 테트리스, 갤러그를 하던 오락실이다. 그 지하에는 궨당네라는 민속주점이 있었다. 이 모든 걸 두루두루 살피는게 일과였던 때다.


(좌)소라다방이 있던 곳, (우) 금화다방이 있던 곳

 



한때 서귀포에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있던 시대가 있었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제주대학교 농수산 학부가 서귀포에 있었다. 

지금의 서귀포의료원과 서귀포고, 중앙여중이 있는 자리다. 


서귀포의 많은 젊은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대학과 직장을 찾아서 떠난다. 

젊음의 문화를 만들 주인공들이 사라진다. 당연히 젊은이들이 쉴만한 곳과 장소도 없다. 


1980년대 잠시 있었다 없어진 음악다방 존재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동시대를 살았던 몇 친구들의 추억의 공간일 뿐이다. 그러기에 남은 추억들을 모아서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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