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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Mar 07. 2023

나는 미디어활동가다.

나는 마을방송을 하는 사람이다. 

좀 더 전문용어를 사용한다면 마을공동체미디어(줄여서 보통 마을미디어라고도 한다) 활동을 하는 미디어활동가다. 부지런히 달려온 길 요즘은 잠시 쉬고 있다. 



나는 2015년 마을미디어가 뭔지도 모르면서 우연한 기회에 시작을 하게 되었다. 

퇴직을 하고 마을일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던 시기였다. "말이 씨가 된다"라고 우연한 기회에 누가 대화 중에 인터넷방송을 얘기하길래 "그거 좋지"하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다음 해에 바로 행정에서 시범 공모사업이 나왔는데 그걸 우리 마을에서 해보자는 제안이 내게 들어왔다. 나중에야 안일이지만 그 제안은 마을에서 같이할 사람들을 찾아서 팀을 꾸리고,  실무적으로 가능한지를 행정하고 한번 검토해 보라는 의미였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일 여유도 없이 사업을 이끌어가야 할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고 올해가 2023년이니 이젠 경력을 얘기할 때 2개의 손바닥을 모두 접고 펴고를 해야 할 경력자가 되어 버렸다. 


처음 사업을 얘기할 때
나는 인터넷방송을 얘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퇴직 전 통신사에 근무하면서 인터넷방송과 유사한 일들을 제안하고 컨설팅하는 일들을 했었기에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방송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얼떨결에 일을 맡고 유관부서와 협의도 하고 기본계획서도 만들어 봤다. 마을에서 같이 일해보겠노라고 하는 주민도 여럿 추천을 받았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송이라는 매력"적인 아이템이니까 같이 해보겠노라고 나섰다. 그런데 참 희한했다. 유관부서와 만나면 만날수록 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참 후에야 안 일이지만 서로의 접근 방향이 달랐다. 난 인터넷방송이라는 기술적인 부분을 가지고 접근했던 반면, 행정에서는 마을미디어라는 콘텐츠나 문화를 가지고 얘기를 진행했던 것이다. 나는 듣도 보도 못했던 용어라 그런 게 있는 줄도 미처 몰랐다. 후에 행정에서 기본적인 자료를 주고 내가 공부를 한 후에야 이해를 하고 간극을 좁혀갈 수 있었다.    



난 건네준 자료를 바탕으로 마을미디어라는 새로운 영역에 대해서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미디어는 2012년부터 서울시의 지원사업으로 시작된 마을공동체 활성화사업 중의 하나였다. 시범적인 몇 개의 레퍼런스 사이트와 마을도 있었다. 행정에서 추진이 불가능한 주민밀착형 사업을 추진하는 공동체도 여럿 있었다. 내용과 과정을 보고는 사실 이해가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내심 놀라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지금에야 내가 마을 만들기 사업이나 공동체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타칭 전문가로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던 개념이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누구 앞에 나서거나 얘기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선 듯 나서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해야 하는 마을미디어가 제주 사람의 정서와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걱정이 앞섰다. 쉽지만은 않을 일인 것 같아서 "우리 하지 말자고" 나는 포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방송이라는 매력적인 분야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미 잘하고 있는 곳들이 있으니 한번 둘러보기도 하고, 어떤 것인지 교육도 받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결정을 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 모두 모아졌다. 난 이과정에서는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 현장을 보자. 결국은 선진지 견학을 떠나고..


2015년 9월경으로 기억을 한다. 마을미디어의 선진지 견학이라는 명분으로 당시만 해도 마을미디어의 성지였던 서울로 출발을 했다.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얘기도 들어보고, 마을방송국 시설도 둘러보고, 콘텐츠도 보고, 마이크 앞에서 시험방송도 해봤다. 


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각자라는 사명으로 고만 고만한 규모와 인원, 콘텐츠로 명백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직 결과를 얘기하기에는 이른, 평가를 할 대상조차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마을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지가 고작 2~3년이니 결과물들이 나올 수가 없었다. 큰 성공이나 발전은 아니더라도 당장 우리 마을과 공동체, 앞으로의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에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다고 했다. 외부에서 보기에 방송한다고 하기에도 우습고, 방송국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다고 한다. 그러나 하고 있는 일만큼은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일을 해도 되고, 이런 분들도 있구나. 반드시 크고 거창할 필요도 없구나 " 


나는 30여 년 동안을 대기업에서 규모와 시스템을 갖추고 일을 했었고, 그다음에 오는 대외적인 명분과 결과를 중시했기에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가가는 방법은 몰랐던 것이다. 생각을 바꿔 보기로 했다.


일단은 출발을 해보고자 했다. 


먼저 마을미디어라는 공감대 형성과 방송을 하기 위한 인력과 기술이 필요했다. 현수막을 붙이고 마을미디어 제작단을 모집했다. 1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참여를 하겠노라고 지원을 했다.

 

공개모집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팟캐스트 제작, 라디오 방송 만들기, 영상제작과 촬영, 사진촬영으로 각 1주씩 3주간 진행되었다. 제주에서는 처음 하는 일이라 도내에는 전문인력이 없었다. 사진을 제외하고는 전부 서울에서 강사를 초빙했다. 


마이크 앞에서 자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게스트를 불러놓고 얘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더 쉽지 않다. 기획서를 만들고, 대본을 쓰고, 믹서를 조작하는 일들 모두 마을미디어에서는 혼자서 해야 한다. 1인미디어다. 모두가 더듬더듬 더듬어가는 더듬이가 되어버렸다. 광고를 받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 소문내면서 들어 달라고 할 것도 아니기에 동료들과 할 수 있는 부분만 큼씩만 해 나가기로 했다. 


웃고 울고 난리가 아니다. 실습과정의 거의 반은 웃음과 N.G다. 그러고 3주를 지나는 사이 우리는 서로를 알았고, 속내를 얘기할 줄 아는 동료가 되어있었다. 혼자가 출발을 해서, 5명이 되고 이제 10명이 넘었다. 이제는 우리가 겪은 과정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면 되는 일이다. 이게 마을공동체 미디어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섣부른 미디어활동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려운 교육과정을 마쳤다. 어렵다기보다는 어색한 교육이었기에 결과물과 경험을 이웃주민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을 유혹하고 싶었다. 우리들만의 추억으로만 묻어 두기에는 아쉬웠다. 


2015년 크리스마스이브전날이다. 다소 들뜬 기분과 함께 "마을미디어 페스티벌"을 했다. 아침 행사장으로 오기 전 나는 CBS라디오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오늘 행사가 있음을 알리고 홍보하는 인터뷰였다. 

"이젠 방송인이 되었으니 전화인터뷰쯤이야 " 자신만만하고 스스럼없이 30여 분간 인터뷰를 했다.  


행사는 주민들을 방청객으로 초대해서 당시 유행하던 "보이는 라디오"도 하고, 교육 때 제작했던 동네 영상들도 상영했다.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다소 의도적인 부분도 있었다. 

2012년 시작한 마을미디어가 전국적인 확산과 활성화를 기대한다는 의미에서 당시 활동하고 있던 전국의 활동가를 모아서 토론회도 했다. 


2015년은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흘러갔다. 한 해 동안 마을미디어를 준비한다고 했지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간도 없고, 장비도 없고, 단지 같이 하고자 했던 동료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꿈에 그리던 첫방을 하다


2016년 우리는 작년에 배운 것을 한번 실행에 옮겨 보고 싶었다. 방송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 거다. 

그러나 현실은 빈털터리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야무진 희망만 남은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믿는 구성이 있었기에 방송을 해보기로 준비를 했다. 


" 나중에 마을에서 마을미디어를 본격적으로 한다면 장비를 마련할 때까지 무상으로 임대해 주겠다"라는 약속이 있었기에 말이다. 다만 그 장비를 설치할 공간이 없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연말에 페스티벌을 보면서 이것은 마을에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동네선배가 공간을 선 듯 내주었다. 전기요금만 납부하는 조건으로 사무실의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공간과 장비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었는데 누가 장비를 만지나..?
난관은 끝이 없다.        


또 난관이다. 라디오 방송의 핵심장비인 믹서를 조작할 사람이 없다. 대여한 장비가 작년에 이 사업으로 구입한 새 장비라 영상위원회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IT업계에 근무를 하다 보니 얼리어댑터의 성격이 강한 편이다. 평소에도 새로운 기기를 사고, 만지는 것을 힘들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요건 상황이 좀 달랐다. 내 장비도 아니고, 가격도 조금 나간다. 주위에 연결된 장비도 많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맡기기도 그렇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기에 말이다. 


고민 고민을 하다가 일단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내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조작하기로 했다. 매뉴얼을 보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한 달 동안 열공에 열공을 했다. 당시만 해도 출시한 지 얼마 안 된 장비라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다행히도 작년 교육 때 강의를 했던 동작 FM의 양승렬 국장이 사용하는 믹서와 우리의 믹서가 동일 제품이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달여를 눈이 오든 강풍이 불든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어느 날 급히 나가느라 믹서 전원을 내리기 전에 스피커 전원을 OFF 하는데 깜빡했었던 것 같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면 스피커 볼륨을 높이는 편이다. 이 상황을 모르고 다음 날 믹서전원을 켜다가 "팡"하면서 스피커가 터지는 바람에 놀란적도 있었다. 



2016년 2월, 지난 한 달간의 믹서 공부를 바탕으로 첫 방송 제작을 해보기로 했다. 

당시 모두가 서툰 우리로서는 누굴 게스트로 초대하서 진행을 하는 것도 두려웠다. 

우리 초창기 멤버 4명이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서 시범방송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원고를 작성해서 주었다. 각자가 얘기할 것을 읽어보고, 수정하고, 암기를 하고, 리허설도 해보고... 

이게 뭔지 할 정도로 긴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우리끼리지만 마이크를 앞에 놓고, 모니터링을 위해서 헤드폰을 끼고 나니 폼은 잡히는데 긴장은 된다. " 녹음방송이니 안되면 다시 하라고, 다시 하면 된다"라고 하는데도 버벅대기 일쑤다. 


신나게 얘기하다 보니 녹음 버튼이 안 눌러져 있어서 다시,

1번 마이크가 안 켜져 있어서 다시,

BGM를 넣었더니 말소리가 안 들려서 다시.. 가기 가지다. 웃픈 상황들이, 추억들이 쌓였다.


녹음을 1월에 끝내고 편집을 하는데도 혼자 똑딱이로 독학을 하고 하느라 한 달이 걸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첫 방송은 2016년 2월에 팟빵 플랫폼에 업로드했다. 1년간의 고민과 노력의 결과였다. 

자칭 방송인으로서 출발한 우리들은 그날 진한 한잔을 하면서 앞으로의 다짐을 했다. 

열심히 부지런히 자부심을 가지고 해 보자고.. 도원결의를 했다. 


2022년 8월 방송을 마지막으로 쉬었다.


"주민이 주인이고, 주인공인 외도마을방송"은 

이제 다른 출발을 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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