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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가정에서 배우는 습관이다

아침 모닝 카톡을 받는 생각

by 노고록

아침부터 휴대폰에서 "사랑해"라는 카톡 알림음이 요란하다.

"사랑해"는 동그라미 가족 단톡의 알림음이다. 서울에 있는 딸들, 군에 있는 아들이 서로에게 전하는 아침인사다. 특히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에는 서로를 격려하는 톡들이 주를 이룬다. 날씨가 나쁜 날, 출근길 변동 사항도 전해주기에 서로에게 좋은 정보가 되기도 하고, 집에서 상황을 모르는 우리 부부에게는 안심메시지다.


나는 자녀들이 어릴 적부터 가급적 많은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대화를 자주 하려다 보니 일단 소재가 많아야 했다. 서로의 일상 사소한 얘기, 속 깊은 얘기, 서로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까지 주고받게 된다. 자녀들의 학교생활이며, 친구들의 얘기, 학교 내 분위기 등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자녀들은 꿈과 희망을 한 번씩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단 대화가 있는 가정, 말을 할 수 있는 집을 만들어보기 위해서다. 긴 세월이 지나고 보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고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가족의 색다른 기억은 녹차 티타임이다.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는 등 개인적인 일을 마치고서는 거실에 둘러 않는다. 가운데에는 조그만 탁자에 모두가 좋아하던 녹차를 준비한다. 사실 내가 좋아하던 차였는데, 다른 가족들도 같이 좋아해 줘서 고마웠다. 따뜻하게 끓여진 녹차를 한잔씩 받아 들고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주제를 가끔 제시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그때의 분위기에 맞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낸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또는 궁금한 일,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했고, 우리 부부도 자연히 얘기 속에 녹아들었다.


어쩌면 초등학교를 다니는 자녀들과 격식을 갖춘 대화와 토론의 시간이다. 자녀들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을 해주는 시간이다. 상투적인 표현이나 욕은 안된다. 일단 누가 얘기를 하면 들어줘야 한다. 중간에 개입도 안 된다. 각자가 돌아가면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된다. 질문이나 궁금증에 답을 해주는 분위기, 반박이나 반론은 없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녀들이 비교적 시간이 있던 초등학교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이면 애들이 막 언어를 배우고 사회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 시기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훈련이 없다. 우리 가정의 티타임이 그런 역할을 했는지, 자녀들은 어디 가서 대화를 하고 자기주장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들도 격식 있는 대화를 하려고 하고, 대화를 중요시한다. 자녀들도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나는 듯 추억거리로 들먹인다.



자녀들이 커갈수록 시간을 같이 하기는 어려워진다. 특히 대학교를 가면서부터는 서로 다른 살림살이가 되었다. 서울과 제주로 생활거점이 바뀌었다. 서울에서도 두 딸은 서로 사는 곳이 달랐다. 5명의 가족이 3곳에 나뉘어 사는 현대판 이산가족이 되었다. 서로 의지하면서, 얼굴을 보면서 애증을 같이 하던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지고 나니 가족을 이어 줄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둘째가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가족 단톡을 만들었다. 2013년이다. 서로의 여유시간을 모르니 시간이 날 때마다 안부를 주고받자는 의미였다. 그냥 집에서 하던 거처럼 일상을 알려주고 하루가 무사했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생존신고를 해달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상황을 모르니 메시지와 답신 사이에 오차가 생긴다. 급해서 보냈는데 답변이 없는 경우다. 평소에는 말로 한참 주절주절 얘기를 해야 하는데 몇 자 안 되는 문자로 의사를 전달하려다 보니 오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감정과 표정이 같이 전달돼야 하는데 단순하게 텍스트만 전달하는데서 생기는 오차다. 따뜻한 말소리에 감정을 싣고 얘기를 하면 좋은 말인데, 텍스트만 몇 자 적어놓고 보니 받는 입장에서는 지시나 간섭으로 보이는 경우가 생겼다. 메라비언의 이론으로 설명이 된다.


서로 난리가 났다.

"왜 간섭하느냐고..", " 하다 보면 답변이 늦을 수도 있지 않냐고.." , "얘기를 하지 말자고.."

서로 얼굴을 보고 만나도 지난 카톡얘기로 다시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생겼다. 이게 뭔 일인지 황당해질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자녀교육을 했던가? 평소 듣도 보도 못한 상황,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시돗힌 문자와 말들이 난무하는 그런 답답한 시간들이 꽤 길었다.


"그래도 대화는 안 하고 살 수 없으니 톡은 최소한만 하고 살고, 있는 그대로만 읽어 보자고, 서로의 말에 꼬투리를 잡지 말자고.." 노력해 보기로 했다.


다시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성장하고, 경험을 하면서 이젠 서로가 얘기를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단톡에서는 서로를 격려하는 이쁜 말만, 일상만 공유한다. 그러다 할 말이 많아지거나, 예민한 말, 대답이 급한 용건이 있으면 전화를 한다. 감정을 같이 전달해 줘야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이슈 브레이커였던 아내는 이모티콘을 많이 사용한다. 딸들은 정기적으로 예쁜 이모티콘을 보내주었다. 우리가 할 말한 메시지가 들어간 이모티콘이다. 감정을 싫은 이모티콘, 부정적인 이모티콘을 보내도 무덤덤하다. (요새는 분위가 좋아서인지 안 보내고 있어서 빈털터리가 되었다)

몇 해 전부터는 대화가 많아지면서 단톡이 여유로워졌다. 반박보다는 이해와 공유의 내용들이다. 이젠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모든 일상을 알고, 고민을 알고 있기에 늘 옆에 있는 붙어있는 가족의 느낌이다. 다시 가족 간의 대화를 찾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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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화가 안 된다고 한다. 아예 대화가 없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도대체.."라는 말을 해야 이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만약 배웠더라도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답을 찾는 기술과 토론을 하는 기술, 논리를 만드는 기술정도였을 것이다.


"대화와 토론은 다르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밑줄은 쫘악 긋고 메모한 글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화를 토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부모와도 토론을 하고, 연인들하고도 토론을 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좀 웃기는 상황이다. 정감 있는 대화가 아닌 토론이니 잘못을 따지고, 논리를 따져야 하니 대화가 진행이 안 되고, 싸움으로 끝난다. 요새 흔히들 얘기하던 "T"와 "F"의 논쟁과도 비슷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토론보다는 따뜻한 대화, 격식 있는 대화, 서로가 힘을 주는 격려의 한마디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엄격하고 따뜻한 게 가정이다. 존중과 배려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가정에서 배우고 익히는 대화는 어떤 모습일까?

대화가 되는 사회, 말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주는 밑바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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