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락션을 울려야 가는 세상
내가 처음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던 1990년대 초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운전자들은 서로를 지켜주는 동반자였다. 경찰이 단속하는 지점을 먼저 통과할 때면 깜빡이 신호를 주었다. 단속 중이니 서행하라는 신호다. 길을 양보해 주거나 실수를 했을 경우는 손을 들어서 감사의 인사를 표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가끔 신호가 바뀐 것을 모르고 지체하다가 출발하는 경우는 차창을 열어서 높이 손을 흔들어 미안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차량이 많지 않던 당시 길거리는 넉넉했지만 그 속을 달리는 오너드라이버들의 마음과 인심도 넉넉했다.
요즘은 다르다. 길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차량만큼 운전자들의 마음도 가지각색이다. 세상을 살면서 다양함이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다양함이란 제멋대로의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다. 원칙과 상식 없이 나만 좋으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생각 말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마침 커피 한잔이 생각나서 인근 커피집에 들렀다. 아내가 마실 차가운 커피 한잔과 내가 한여름에도 마셔야 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고 차에 앉았다. 출발을 하니 신호등이 잠시 쉬었다 가라는 신호를 주었다. 빨리 가고픈 마음에 신호등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마침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차가 움직이지를 않는다.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래도 앞차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짧은 신호라 더 이상 기다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크략션을 눌었다. 그때야 알아챘는지 앞의 차가 움직였고, 나도 따라 좌회전을 해서 돌아섰다.
예전에는 신호등과 신호등 간격이 어느 정도 확보 되는 듯했는데, 이제는 가는 곳마다 신호등이다. 불과 100m도 안 되는 지점에서 다시 신호등을 만났다. 다시 기다려야 했다. 신호등이 바뀌었는데 앞의 차가 움직임이 없다. 가만 보니 좀 전에 신호등에서 내차 앞에 있던 차였다. 다시 크락션을 눌렀다. 다시 출발을 하고 나도 따라나섰다. 짧은 구간에 연이어 들어선 신호등은 시간들이 짧아서 제때 출발을 놓치면 다시 신호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런 구간에 들어서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출발점에서 여기까지 500m도 안 되는 구간인데 3번째 신호등을 만났다. 여기서 좌회전을 받으면 집으로 들어서는 마을 안길 이다. 늘어선 차량을 비껴서 좌회전을 하기 위해서 1차선으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날씨가 무지 덥다. 모두 윈도를 닫았는데 옆차선에서 윈도를 열고 얼굴을 내민 운전자가 보였다. 그리곤 그 얼굴이 내차를 향하고 있었다. 20대 후반 정도의 나이 남자였다. 눈으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부라리고 있었고, 입은 뭔가를 말하는 듯 삐쭉거렸다. 훅 지나고 보니 좀 전 2번의 신호등에서 내 앞을 가로막았던 차량, 내가 크락션을 눌려야 출발했던 그 차량이었다. 아마도 좀 전의 나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냥 쌩 달렸다. 본인이 잘못은 해놓고, 잘못을 지적하는 상대방에게 왜 나의 잘못을 지적했느냐고 따지려는 모습이다. 본인이 운전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라도 내 차 안이니까 내 맘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에 전제돼있지 않았나 한다.
40여 년 운전을 하면서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 운전을 하다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상대방에게 불편을 주는 경우도 있고, 내가 기분이 언짢은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사고가 아닌 이상 문을 열고 상대방에게 응대하지를 않는다는 원칙이다. 내가 잘못했으면 손을 흔들거나, 인사를 하면서 그냥 지나친다. 나서서 얘기하고 싸워본들 치킨게임으로 서로의 기분만 나빠지고, 운전하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좋은 말만 하자, 칭찬만 하자, 긍정적인 말만 하자는 사회의 주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언론에서도 많은 논객들을 출연시키면서 그런 분위기 확산에 열심이었고, 학교에서도 그랬다. 잘못을 지적하고, 오류를 비판하는 사람은 그저 부정적이고 나쁜 사람으로만 분류를 했다. 잘못이나 오류를 지적받지 못하는 세상,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을 한참이나 살아왔다.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사회에는 건전한 비판이 사라졌다. 비판을 하면 자신의 적이 된다. 남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전제다. 그냥 나와 반대되는 사람이다. 찬성과 반대, 나와 너의 프레임 전쟁, 진영전쟁이 된다.
개인들의 잘못도 지적할 수 없다. 평소에 잘못을 지적받으면서 살아온 경험이 없기에 지적을 받으면 그 자체가 불만이다. 인정할 수 없다. 바로 적이 된다. 왜 나에 대해서 판단을 하고 잘잘못을 얘기하지, 지가 뭔데 하는 분위기다. 극단적인 개인주의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내가 하면 되는 거지, 그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같이 사는 공동체가 아니고, 내만 사는 세상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흘러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신호등이 없어졌다.
아니 신호등은 있는데 신호를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신호등을 무시하는 것이다.
거대한 세상을 움직이는 "신뢰의 법칙"을 무너뜨리는 소리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들린다.
마치 그게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듯이 으시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오늘도 TV를 켜면 방귀 뀐 놈들이 성내는 모습을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