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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의 마음을 훔치는 말 한 마디

320번 제주버스에서 생긴 일

by 노고록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말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말이다. 우리들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잘 알지만 가장 실천을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시간이 여유가 있는 날이거나, 회의 후 저녁회식이 예정되어 있는 경우다. 제주도의 대중교통이 공영으로 바뀌면서 버스의 출도착 시간이 앱으로 공개되고, 상호연결 편이 좋아지면서 달라진 나의 일상이다. 1~2번의 환승과 조금만 걸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저렴하고 쉽게 갈 수 있다. 단지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단점은 있다. 30여 년 이상을 자가용에 익숙한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버스여행도 나름대로의 낭만과 여유가 있다는 생각에서 지속하는 나의 또 하나의 생활패턴이다.


교통체계가 바뀌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불편한 것도 많다. 대부분의 오너드라이버들이 느끼는 그런 생각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런 점들의 대부분은 대중교통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정작 내가 가장 불편한 것은 일부 기사님들의 불친절과 난폭 운전이다. 공영버스가 되면서 고용이 안정되고, 우리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다면 더 친절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일 것 같은데 많은 기사님들이 그렇지 못함은 슬프기도 하지만 불쾌하기도 한 대목이다. 물론 친절하게 하시는 분들, 그냥 충직하게 매뉴얼에 따라 근무를 하는 분도 많지만 그분들보다는 일부 불친절한 기사님들의 행동이 기억에 남고, 그 기억에 따라서 버스라는 교통수단의 이미지가 결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기사님들이 친절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내렸던 경우는 거의 없다. 낯선 언어로 오르고 내리기를 재촉하기도 하고, 초보 운전인 듯 급정거와 출발을 반복하기도 한다. 뭔가에 화가 난 듯 투털거리면서 운전하기도 하고. 관광버스를 운전하는 듯 시간표를 무시해버고 유람을 하는 기사도 있다. 시간표를 보고 미리 버스를 탑승하건만 회의 시간을 어긴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다녀오면 지치다고 푹 쳐지는 나를 보면 이제 아내는 "버스 타고 다녀와서 그래.."라고 원인 분석을 해준다. 제도가 아닌 사람의 문제다.



저녁시간 옆 마을에 토론회를 모니터 할 일이 생겼다. 19시가 예정시간이라 다녀오면 우리 아파트에는 주차할 곳이 없다. 버스를 타고 다녀옴이 좋을 듯했다.


퇴근시간이 겹치는 시간으로 모두가 피곤한 시간이다. "어서 오세요" 좀 나긋한 목소리에 나는 조금은 당황했다. 무의식 중에 기사님의 얼굴을 보면서 버스에 올랐다. 젊은 분이다. 가볍게 들어선 버스 안, 퇴근시간과 하교 시간이 겹치다 보니 제법 사람들이 많다. 제주버스는 최근 양문형 버스를 도입하다 보니 버스의 가운데 부분에는 좌석이 없다. 버스의 반은 입석이다. 모두들 서 있어서 버스가 만원인 듯 보이기도 한다.

다음 정거장에서 버스가 서자 앞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인사말 치고는 좀 길다. 2~3번 버스가 세우는 정거장마다 앞에서 말소리가 들리길래 신경을 쓰고 들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기사님의 말소리였다.

버스를 탈 때 가볍고 짧은 인사말은 들어보기는 했어도 내릴 때 이런 인사말을 들어보긴 아마 처음인 듯하다.

"오늘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멘트 자체에 매우 직관적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사실 이런 인사말은 흔하게 주고받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적 교감이 있는 경우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기사님은 내리는 승객마다 그런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이 책가방을 메고 내리는 데도 "오늘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인사말을 해주었다.


내리는 승객들은 기사님의 갑작스러운 인사말이 어색한지 대답을 못했다. 얼굴만 소리 나는 쪽으로 돌리고는 이내 내렸다. 계속되는 기사님의 인사말에 버스 안에 있던 승객분들도 이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나중에는 작은 소리로나만 "감사합니다", "고생하십시오"라는 인사말을 하고 내리기 시작했다.

친환경 양문형 제주버스


10여 개의 정거장을 지나 내가 내리는 곳에 서니 약속이나 한 듯 5~6명이 같이 내리게 되었다.

기사님이 "오늘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인사말을 하자

내리던 우리는 단체로 "고맙습니다. 고생하십시오"라고 합창을 하고 내렸다.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고, 몇 자 메모를 했다.

그냥 잊기에는 아까워서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오늘 아침 그 길을 지나오는데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아내에게 얘기를 했다.

"어, 나도 지난번에 버스를 탔는데, 내릴 때 인사말을 하던 친절한 기사님이 있었는데, 그 기사가 그 기사 아닌가? " 아내가 하는 말이다. 어제 내가 경험한 기사를 지난주에 아내가 먼저 경험한 모양이다. "그 친절함을 어디 알려주고 싶더라고.."

글방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을 열고 제주도청 사이트에 그 기사님의 친절함을 공개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고 했는데

어제 그 기사님의 "오늘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한마디는

그동안 제주버스에 가졌던 불쾌감을 달래주는 상큼한 말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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