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자니...
저녁식사가 끝난 시간이면 TV 앞에서 리모컨을 돌리는 게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다.
수도 셀 수 없는 TV채널, 이곳저곳을 누르다 관심이 끌리는 장면이 있으면 잠깐 멈춰서 본다.
한 30초 정도, 맛보기를 하고는 계속 시청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선택의 대상이 적어도 아쉽지만 너무 많아도 골라먹기가 힘들다는 게 실감하게 되는 요즘 방송 환경이다.
잠깐 귀에 익은 노랫소리에 리모컨을 멈칫했다.
"..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아니 내가 불렀던 익숙한 노랫말이다.
그러나 무슨 노래인지 제목은 아리송하다.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서 검색창에 "내일은 해가 뜬다"를 입력하니 금방 답이 나온다. 참 좋은 세상, 편한 세상이다.
"사노라면"이라는 노래였다.
제목을 알고 나니 이 노래를 처음 접하게 된 날의 추억이 떠올랐다.
1980년대 중반 무렵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다.
서귀포에서 곤소리라는 클래식 기타 동호회 활동을 2년 정도 했다. 공간은 어디인지를 몰랐고 그냥 친구의 홀림에 따라서 기타를 치기 위해서 무작정 따라갔다. 돌출 간판이 있는 게 아니고 여느 건물과 마찬가지로 2층에 다방이 있는 상가의 3층 건물이었다. 생각 없이 들어간 건물, 나중에 보니 3층 공간 전층은 YMCA 회관이었다.
흔히들 그렇치만 공간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왠지 모르게 공간에 압도되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행동도 부자연스러운 경우다. 그렇다고 그 공간이 물리적으로 거대하고 큰 공간을 얘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름하고 초라하더라도 분위기상 압도되는 공간들이 있다. 그러기에 나는 어떤 공간을 들어갈 때 공간의 분위기에 압도될만한 곳은 좀 꺼린다. 사실 YMCA라는 공간도 내게는 그런 곳이었다.
70년대부터 이어진 군사정권시절 YMCA는 민주주의 수호의 보류로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에 비친 Y의 모습은 민주와 정의를 대변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반대와 투쟁의 근거지로 이미지화된 곳이다. 으레 민주화 성명을 발표한다면 종로 YMCA회관이 등장하곤 하던 시절, TV에 그런 모습만이 보도가 되었고 이를 항상 적대시하는 정부를 언론에서 비춰주었기에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YMCA라는 공간은 그냥 누구나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그냥 노래만 부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선입견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냥 쭈뼛쭈뼛하면서 따라 들어간 방, 허름하고 조그만 공간이었다. 기타만 칠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니었고 여러 동아리들이 돌아가면서 사용하는 동아리방 정도였다. 7~8명 되는 사람들, 모두 여자분들이었다. 좀 어색하고 낯설기는 했다. 신입인 친구와 내가 간단히 인사를 하자마자 기타가 등장했다.
처음 온 우리를 위해서 클래식기타로 환영 연주를 해주었다.
작은 공간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여러 명이 합주하는 기타 줄의 선명한 소리는 나도 모르게 잠시 눈을 감게 했다. 아마 내가 통기타를 친 지는 좀 오래되었지만 정통 클래식연주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클래식 기타의 연주는 또 다른 음악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기타의 모습이 아니었다.
YMCA라는 공간과 기존회원들이 모두 여자분들이어서 어색했던 나의 기분은 6번 기타 줄의 퉁퉁거리는 소리를 타고 날아가버렸다. 이어서 회장님의 클래식기타의 진수를 잠시 보여주었다. 이름 모를 연주곡, 상단의 베이스라인이 깔리면서 그위를 빠르게 타 고도는 손놀림의 연주는 잔잔한 강물 위를 도도히 흐르는 마치 끊어질 듯 말듯한 가냘픈 숨결과도 같았다. 그냥 보통의 숨을 쉬면서는 들을 수 없는 연주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트레몰로 주법으로 연주한 "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아주 유명한 곡이었다. 지금도 그 조그만 방에서 울려 퍼졌던 그 음악의 향기는 여전하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끝나고 다 같이 노래 한곡하자고 보면대 위에 악보집을 올려놓았다.
"아침이슬"과 "사노라면"이었다. 첫 노래야 귀가 달토록 불렀지만 두 번째 노래는 금시초문이다.
"여기서는 이런 노래를 부르는구나"하는 잠시의 혼돈이 있었다.
매번 긴장되고 조마조마하던 클래식기타의 연습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전문적으로 얘기해서 손과 마음을 푼다고 했다. 아침이슬은 익히 잘 알고 있는 노래라 기타를 건네주기에 코드를 짚었다. 사실 이런 노래는 떼창의 소리가 너무 크기에 연주실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침이슬"은 언제 어디서 부르더라도 잔영이 남는 명곡이다. 부르고 나면 뭔가는 막혔던 혈이 뚫리는 듯 카타르시스가 있다. 아무도 없는 공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사노라면"은 감을 잡을 수 없는 노래였다. 그러나 기타를 치는 사람들의 습관이 있다. 한 노래가 끝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서 모르는 곳이 나오더라도 스트로크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래는 부르는 사람이 부르고, 그 템포나 분위기에 맞추어서 기타 코드를 잡으면서 스크로크를 해주면서 면피를 한다.
"사노라면"이라는 노래가 길지 않고, 가사가 후렴구에 반복적인 데다, 기타 코드도 쉬웠다.
연주를 하면서 금세 따라 부르다가 익혔다. 노래의 분위기는 아침이슬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마치 아침이슬 2편과 같은 노래였다. 이런 노래는 마치 돌림노래 같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니 한 번만 불러도 마치 여러 번 부른 것 같은 착시가 있다. 금세 노래를 익혔다. 흥얼거림은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의미를 알기 때문일까?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한숨일랑 쉬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
우리들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가감 없이 그냥 글자로 옮겨 놓은 듯 가사가 참 인간적이다.
어려운 말 고상한 말로 포장할 줄 모르는 찐 친구가 옆에서 진심을 담아서 들려주는 투박한 위로의 말 같다.
깊은 무게감이 가슴을 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게 살던 시절, 물질보다는 젊음과 희망을 가지고 산다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지 않겠나 하는 기대와 희망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다.
그 시절 막걸리 한잔을 앞에 놓고 그런 얘기를 안주로 주고받다 보면 날이 밝아오곤 했다.
"사노라면..."
그러기에 혼자 부르기에는 뭔가는 조금은 아쉬운 노래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의지를 다지고 파이팅을 하면서 부르기에 참 좋은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