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1 시절, 교실은 가끔 공연장이 되었다
" 잊으라면 잊겠어요 당신이 잊으라시면...
보고파도 잊겠어요 생각나도 잊겠어요....."
가수 이용복의 노래다. 이 노래와 연상되는 까까머리 친구와 추억이 있다.
1974년 중학교를 막 입학했을 때다. 내가 배정받은 중학교는 서귀포 시내 가운데에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가기 전, 1학년때 일이다. 잠시 사용했던 교실은 1960대 지어진 낡은 건물이었다. 교실에 있는 책상이나 걸상도 마찬가지였다. 다 낡아서 부러질 듯 말 듯한데, 그 책상 위에 올라가서 위험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무대 매너를 보여주던 친구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서귀포시내에는 국민학교가 3개 있었다. 그리고 남자들이 갈 수 있는 중학교는 둘이었다. 마침 중학교 입학시험이 없어지면서 무시험 추첨배정을 했다. 나는 다행인지 집 바로 앞에 있던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뒷문으로 월담하면 100여 m, 정문으로 가더라도 200여 m 바로 집 앞이라 편했다.
그런데 입학식을 하고 얼마 없어서 흉흉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힘깨나 쓰는, 당시 솔동산을 휩쓸고 다니던 친구들이 모두 나와 같은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서귀포시내는 솔동산을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국민학교 출신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던 시절이다. 솔동산은 서귀포의 구도심이라 당시만 해도 온갖 상권들이 밀집해 있었다. 잘 사는 사람, 힘 있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다. 당연히 그 학교 출신애들은 공부를 잘하는 애들도 많았고, 운동을 잘하는 애들도 많았고, 부잣집 애들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당시 말하는 소위 노는 애들도 많았다. 그중 우두머리를 비롯한 몇 애들이 우리와 같은 학교에 배정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소문만은 아니고 사실이었다.
처음 멀리서만 보는 애들, 그들은 생김새나 하는 행동이 달랐다.
당시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면 모두 까까머리에 까만 교모를 써야 한다. 그들은 학교 뻇지가 안 보이게 누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상의 후크를 열고, 제일 위의 단추 1~2개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가방은 손으로 드는 게 아니고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탁 보면 외양으로도 그들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대하면 모습이나 말, 행동이 모두 거칠었다. 물론 처음 보는 애들한테는 세 보이게 하려고 그런 오버액션도 있었겠지만, 우두머리애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 선배에게도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시내에서는 일명 깡패(?) 학교로 알려진 학교라 선후배 간의 질서가 엄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동은 약간은 파격적이었다.
그 패거리 중 가장 작고, 여릴 것 같은 정**친구가 나와 같은 반이었다.
보아하니 무리 중에서 막내역할을 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노래도 잘 불렀고, 재롱도 잘 피웠다. 일종의 분위기 메이커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우리 학교는 중, 고등학교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다. 1955년 개교를 하면서 이었던 교사들은 대부분 철거를 하고 새로운 건물로 지어서 이사를 가고, 구교사는 딱 3개의 교실만 남아있었다. 그게 중학교 1학년 3개 반의 교실이었다. 허름한 1층 교사, 전부 다 마룻바닥이다. 복도와 교실사이는 전체가 창문으로 복도를 지나갈 때면 교실이 훤히 보였다.
쉬는 시간이면 우리 반 복도로 옆반 애들이 우르르 모인다. 친구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교무실이 우리 교실과는 좀 떨어진 다른 건물에 있어서 선생님들에게 걸릴 걱정도 없다. 친구는 손에 잡히는 대로 뭐를 들고 책상 위에 올라가서는 노래를 불렀다. 개사한 가사 자체가 19금의 EDPS이다. 좁은 책상 위에서 화려한 골반 돌리기와 몸놀림이 충격적이었다.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테크닉이었으니 말이다.
뭐를 하든 오래 하다 보면 꼬리가 길어서 잡히기 마련이다. 입소문 타고 번진 소문을 교무실까지 번지고 이윽고 발각되는 경우도 생겼다. 당시에는 문제가 생기면 학생들을 바로 징계를 했다. 유기정학, 무기정학, 퇴학 등이다. 학교를 들어서면서 게시판을 보면 매달 징계정보가 떡 붙는다. 비일비재한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일이라고 할 것도 없던 시절이다. 그 친구도 상습적이긴 했는데 굳이 징계를 받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당시 엄격하던 학교분위기와 규율이 있던 시대 학생의 본분을 벗어난 일탈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경고를 받을 뿐이었다. 그 덕에 그 친구의 공연은 종종 볼 수 있었다.
다소 어색했던 입학 초기, 낯섦에 딱딱할 수 있었던 교실과 친구들의 분위기는 난데없는 친구의 공연으로 유연하고 부드럽게 되었다. 어쩌면은 교실의 활력소였는지도 모른다.
그 후 한참 세월이 흘러서 서귀포를 갔다가 그 친구를 가는 듯 오는 듯 만났다. 고등학교를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어색한 상황, 그 친구를 택시 기사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14살 까까머리 중학생의 모습이 배어있었다. 그러기에 단방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인생'이라는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세상을 떠난다.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스토리와 장면은 만들고 채워진다.
그러나 그 장면은 단지 혼자만의 기억 속에서 떠올려볼 뿐 재생은 불가능하다.
추억과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가끔 내 플레이 리스트에서 나오는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까까머리 중학생시절 어색해하던 우리를 웃게 해 주었던 친구가 생각이 난다.
난, 오늘도 추억을 먹고 산다.
과연 그 친구는 좋은 노래를 어떻게 개사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