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제주다. 난 지금 서울에 와있다. 년 초부터 낯선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큰딸이 오늘부터 5일간 변호사시험을 치른다. 아침 7시에 도시락을 챙겨서 시험장으로 보냈다. 이제 시험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7시까지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그저 기다림의 시간일 뿐이다.
기다림이란 사람을 늘 애타게 만든다.
우리네 부모님은 그랬다.
내가 예비고사를 보던 78년에도 그러했고,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수능을 보고 있는 지금 디지털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자녀를 시험장에 보내놓고, 여전히 시험장 대문과 절, 교회에서 108배와 합장 기도로 그저 무탈하게 시험이 끝나기만을 빌면서 기다린다.
자녀들이 시험을 보면서 마음을 조아리며 긴장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편하게 있으랴 하는 마음인 것이다.
수능을 넘어선 후에도 자녀의 일생을 결정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시험날이면 부모님은 마냥 죄스러워지기만 한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런 시험에 들게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번 주 5일간 우리 부부는 둘째가 수능을 치른 후 7년여 만에 가져보는 수험생 부모로서의 생활이다.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걷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을 것 같다. 마침 애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한 참이라, 동네 구경도 할 겸해서 아내에게 무작정 걸어보자고 제안을 했다. 추운 겨울 날씨에 마음도 추울 것 같아서 두꺼운 패딩을 잘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길거리는 한산했고 인도를 따라 이따금씩 날리는 낙엽만이 낯선 도심에서 불편한 지금의 우리 부부의 심정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별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석촌호수의 물결은 너무나 잔잔했다.
집을 나설 때 저 멀리 보이던 롯데타워가 내 눈앞에 보인다. 머리를 90도로 꺾어야만 타워의 꼭대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왔다.
"높긴 높다" 투덜거리면서 촌놈같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는 듯, 타워 맨 꼭대기를 쳐다봤다.
평창올림픽이 열리던 해 모처럼의 기회를 얻어서 롯데타워의 스카이라운지를 둘러본 적은 있는데, 외관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롯데라는 이름만 보인다. 롯데타워, 롯데월드, 롯데 백화점, 롯데마트 등등..
“이 동네는 완전히 롯데 공화국이네”하고 질투반 부러움반의 탄식이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호수의 산책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한 무리 사람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쪽을 살펴보니 호수 가운데 있는 놀이기구에서 나는 소리였다. 우리는 호수 가운데에 있는 놀이시설을 동시에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팻말을 보니 여기가 석촌호수라고 적혀있었다.
석촌호수의 물결은 말 그대로 너무나 잔잔했다. 호수 주변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에는 트래킹 하는 사람, 힘차게 러닝을 하는 운동선수들, 한가하게 산책하는 이들로 제각각이다. 잔잔한 호수와 함께 말 그대로의 정중동을 느끼게 한다.
산책로에는 푸르름을 모두 내준 채 앙상한 가지만을 치켜세운 플라타너스가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추운 겨울, 가로수로서의 제 역할을 다한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한가하게 이리저리 뒹굴면서 오랜 기다림 끝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낙엽조차도 여유로워 보인다..
겨울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여기에 마음의 기다림을 더하니 호수가의 바람은 많이 차기만 하다. 마스크와 두꺼운 방한 장비가 없으면 얼굴을 찌푸려야만 견딜 수 있을 정도다.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여기 와서 이런 찬바람을 맞고 있는 걸까? 여기 오면 호수 바람이 있어서 추울 거라는 것을 알 텐데?? ” 산책로에 나뒹구는 플라타너스 낙엽을 꾹꾹 밟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걸음을 재촉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