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에 짐을 풀면서 자동차 여행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했다. 장점은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 역시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건강에 신경 쓰고 있기에 일반적인 여행객들의 짐과는 차이가 있다. 나는 운전 중 아픈 어깨를 위해 지압봉과 어깨안마기를, 니콜은 요가매트와 폼롤러, 체중계까지 챙겨 왔다. 짐만 보면 뭐하는 사람들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들어가고 싶었지만 1m가 넘는 폼롤러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엘리베이터에는 우리말고도 세명의 사람들이 같이 탔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지만 내 발은 불수의근이 된 듯 구석자리로 몸을 이끌었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 끈적한 바닷바람이 코를 휘감는다. 묵직하게 피부에 닿는 것이 제주와는 결이 다르다. 방파제를 따라 걷는 길에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 바로 앞이라 전망이 좋을 것 같았다. "이야~ 저런 곳에 살면 어떨까?" 아침저녁으로 바다를 끼고 사는 삶이 궁금했다. 그림 같은 풍경에 넋을 놓다가, 빨래를 널 때면 눅눅한 바닷바람이 싫어질까? 제주에 살면서도 겪어 보지 않은 일이기에 잘은모르지만, 이상과 현실이 다를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내 맘을 들여다본 니콜은 제 빠르게 시세 검색을 해본다. "오, 오빠 생각보다 싼데. 연식이 좀 오래돼서 그런가 봐." 물론 싸다고 해서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시세 창을 보며 시시덕 거리는 동안은 내 것이라도 된 양 즐거웠다.
가벼운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욕조에 물을 받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찜질방에 못 간지 2년이 넘었기에 이렇게라도 기분을 내고 싶었다. 뜨끈한 온수가 내뿜은 수증기가 욕실을 채우고 천천히 몸을 담그니 영혼까지 치유되는 것만 같다.
"수민아, 어서 들어와. 아빠가 물 다 받아놨어." 처음 해보는 욕조 체험에 잔뜩 흥분한 딸이 '풍덩'하고 뛰어 들어왔다. "좋다. 조오타. 조옷타." 좋다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엄마 앞으로 숙소는 무조건 욕조 있는 곳으로 해주세요!"
욕조에 빠진 딸은 샹그릴라 호텔을 10년 인생 최고의 숙소에 올렸다. 목욕을 마치고 샤워가운을 입었다. 니콜은 그 모습을 보더니 중국 부호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지기 싫어하는 수민이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나 봐, 나 좀봐. 나는 미국 부자야!"
TV를 켜자 익숙한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 주연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아내와 사별한 아빠를 위해 크리스마스에 라디오 방송에 전화를 건 조나. 우연히 방송을 듣게 된 애니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샘이 혹 자신의 운명이 아닐까 생각하며 빠져든다. 시애틀까지 날아가 샘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려 하지만,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에 실망한 애니. 결국 약혼자에 대한 마음도 운명적 사랑도 잃게 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마스 영화가 그렇듯 샘과 애니의 운명적 만남은 이루어지고 영화는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된다.
한 여름에 보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통해 우리 부부의 만남을 돌이켜 보았다. 대학 시절 뮤지컬 캣츠 스태프로 아르바이트하던 중 만난 우리는, 몇 번의 위기를(대 부분 내 잘 못) 넘기며 7년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예쁜 고양이가 품에 안긴 태몽을 꾼 니콜은 꼭 닮은 딸을 낳았다. 나는 남편에서 민박집 고양이와 집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겉으로는 시크하지만 속 마음은 한 없이 여린 아이. 아빠가 불쌍해 보일 때면 자기 저금통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주는 영화 속 조나와 닮은 아이. 조나가 없었다면 둘의 사랑은 시작조차 될 수 없었겠지.
니콜이 수민이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아빠는 남이고 너는 딸이야. 엄마는 수민이를 훨씬 사랑하지." 아빠보다 자기가 덜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 투정 부릴 때 하는 말이다. 농담인 걸 알면서도 섬찟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샘과 애니처럼 운명적으로 만난 건 니콜과 수민. 난 그 만남을 위한 제물 같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