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기 싫지만 안 받을 수 없는 녀석,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노출됐을 때,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두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다. 니콜의 경우 서점과 북토크가 상비약 같은 거라고 하는데 나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오빠는 기타 치는 거 아냐?"
물론 기타 치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지만, 연주가 잘 안될 때는 되려 내상을 입기도 한다. 어떠한 상황에도 큰 기복 없이 만족할 만한 것을 생각해보니 극장에서 영화 보기가 떠올랐다. 영화를 좋아해서라기 보다 극장이 주는 설렘을 사랑한다.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 달달한 팝콘 냄새, 무겁게 밀리는 차음 문, 유치한 지역광고, 본 편보다 재미있는 예고편, 영화까지 재미있다면 금상첨화 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하다. 가끔씩 집에서 빔을 쏴 분위기를 내 보기도 하지만, 온전히 영화에 몰입하기엔 극장만 한 것 없다. 스스로 선택한 구속 앞에서 핸드폰도 걱정거리도 무음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직업체험을 하려면 철저한 계획과 눈치가 필수, 아이가 체험 중일 때도 엄마는 쉴 새가 없다. 크림빵이나 소시지 따위를 만드는 아이를 향해 잽싸게 셔터를 누르고, 곧장 다음 체험을 물색해야 한다. 엄마들끼리 조를 짜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얌체족들도 있다고 하니, 아이들의 직업체험이 내게는 공포체험처럼 들렸다.
니콜은쑴이즐거워하는걸보는것만으로도행복하단다. 진정한 행복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것인가. 고귀한희생정신에절로고개가숙여지는순간이다.
덕분에자유시간이생겼다. 비는그칠줄모르고, 흐린하늘만큼이나 심란한속을달래고싶어극장을찾았다. 때마침박해일배우의 '한산'이상영 중이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고, 조선 수군이 왜선들에 둘러싸여 위기에 빠진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대포 한 방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거북선은 전체적인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가시 돋친 덮개 부분만 노출시키는 은유적인 등장 법을 쓴다. 뒤엉킨 배들 사이를 유영하듯 '스르르르' 지나가는데, 의자가 떨릴 정도로 묵직한 중저음이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그 큰 상영관에 20명이 채 안 되는 거 같다. 애정행각을 벌이는 연인도, 의자를 차는 아이도 없다. 전후좌우 신경 쓸 것 없는 쾌적함. 이거지, 이거야.
영화를 보고는 라이프스타일 서점 아크 앤 북에 들러 책을 샀다. 심플한 일러스트가 세련된 '제로퍼제로'의 그림책 <Father and daughter>. 신규가입 쿠폰으로 할인까지 알뜰하게 챙겨버렸다(훗~ 나란 녀석). 서가를 둘러보는데 한쪽에 '커블 체어'(손연재가 모델이던 기능성 의자)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한때 호기심 천국을 즐겨 본 사람답게 바로 한 자리 잡아서 책을 펼쳐 들었다.
'오호~ 허리는 받쳐주고 골반은 모아주는구먼, 늘 궁금했는데 이런 느낌이었군.'
책을 보다 궁금했던 의자에 앉고, 요리책을 보다 프라이팬을 사게 되는, 라이프스타일 서점이 뭔가 했는데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요즘은 모든 분야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 같다. 곰표에서 나초가 나오고 말표에서 맥주가 나오기도 한다. 나 역시 비앤비 호스트이자, 독립출판 작가, 북디자이너, 주부로 살고 있으니 뭐 하는 사람이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아크앤 북의 하이라이트는 전면 창을 통해 석촌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휴게 공간이다. 거대한 통창 너머로 여름빛을 머금은 호수와, 주위를 두른 진녹색 나무들이 풍경화처럼 걸려 있다. 살짝 떨어져 앉은 부부도, 찰싹 붙어 앉은 연인도, 대동 단결한 듯 같은 곳을 보고 있다. 여름을 넘어 가을이 된 호수는 어떤 색을 품고 있을까.
서점을 나와 5층으로 가니 시간이 거꾸로 흘러버린 듯한 카페가 있다. 대중음악 박물관에서 만든 음악다방이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레트로 한 인테리어와 옛 대중음악이라는 소스를 잘 버무려 놨다. 테이블에 CD플레이어가 설치되어 있어 옛 음악을 감상할 수 있고, 매장 한편에는 시대를 풍미했던 뮤직비디오가(To heaven) 상영 중이다. 커피맛 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훌륭했다. 상호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유명한 곳의 원두를 쓴다고 적혀있다. 그렇게 적혀있으니 더 맛있는 거 같다. 때마침 가장 있어 보이는 자리가 하나 나서 던지듯 음료를 올려놓았다.
작가의 책상이라고 해야 할까. 앤틱 한 라디오와 스탠드, 책꽂이에 꽂힌 두툼한 책들까지 앉아서 뭐든 쓰기만 하면 노벨 문학상이 될 거 같다. 나 역시 심사숙고 끝에 인스타 피드를 하나 올렸다. 노벨상은 힘들 것 같다.
'스트레스 해소에는 극장이 최고야라고' 했는데 극장 말고도 다른 처방전이 많은 것 같다. 서점에서 책 보다 구석구석 탐험하기, 맛있는 커피와 사람 구경(엿듣기 포함), 마트에서 군만두 시식하기(찐만두는 패스), 버거킹에서 와퍼 하나에 주니어 와퍼 하나 추가하기 등등. 적어놓고 나니 지질하고 궁상맞아 보이지만 이게 나인걸 어쩌겠는가. 스마트폰 메모장에 리스트업 해서 나만의 리츄얼로 만들어 봐야겠다.
'무지' 매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온 모녀와 상봉했다. 쑴은 직접 만든 크림빵과 소시지, 에그 샌드위치 등의 전리품을 꺼내어 자랑한다. 아빠주려고 열심히 만들었으니 무조건 다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 상큼한 조합은 아니었지만 출출했던 배가 부르고, 종일 혼자라 쓸쓸했던 감정이 차 올랐다. 혼자도 좋지만 함께가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치유의 에너지에는 비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