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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Nov 21. 2022

장모님의 요술 통장

취향의 자리를 찾아서 / 강릉 장모님 댁

"어머니 이게 뭐예요?"

강릉 장모님 댁에 도착해 침대 맡에 몸을 기대는데 요상한 물건이 눈에 띈다. 도자기 재질로 되어 있고 소라빵 같이 생겼는데, 용도를 추측할 수가 없다.

"응, 그거 좌욕기여. 친구들이 좋다고 하나씩 사길래 나도 샀어. 요렇게 코드 꽂으면 뜨듯해진다니. 그럼 사타구니랑 항문 사이에 갖다 대고 깔고 앉는 거야. 앉아서 항문에 힘을 줬다, 뺐다. 이게 여자들 요실금에 그렇게 좋다네. 남자들 전립선에도 좋다니 사위도 한 번 해봐."


'아이고, 또 친구들 꼬임에 넘어가 헛돈 쓰셨구먼.' 속엣말을 하며 좌욕기를 전립선 부근에 갖다 대고 앉았다. 어라? 요것 봐라! 뜨끈뜨끈한 기운이 나의 소중한 곳을 감싸오며 온 몸에 열이 돌기 시작한다. 으어~~~


"어... 어머니 이거 얼마예요?"


좌욕기뿐만이 아니다. 주방 선반에는 에어프라이어와 자이글, 요구르트 제조기가 곱게 자리하고, 냉장고 문을 열면 각종 드링크부터 영양식품들이 빼곡하다. 침실 쪽으로 눈을 돌리면 아기자기한 액자, 인테리어 탁상시계, 한샘에서 사셨다는 릴랙스 체어가 아늑함을 뽐낸다. 작은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개미지옥 같은 이마트 매장에 들어선 착각이 든다.

도시 문명을 사랑하는 쑴도 장모님 댁에 오면 나가자는 말을 안 한다. '나가긴 어딜 나가, 여기 다 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혼자 사시는 분이 저 많은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저 짐을 다 어찌하시려고 저러나.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가다 보니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제주와 서울로 물건들이 이동하는 것이다. 집이 꽉 찰 때 즈음이면 딸이 찾아오고, 아들이 다녀간다. "어머님 이거 뭐예요?" 하면 "그거 가져가, 너네가 가져가 써." 하신다. 애써 장만한 물건들은 어느새 자식들의 차 안에 실려있다. 고만 좀 사라고 핀잔을 주고는 지들이 다 가져간다.


우리가 아무리 아껴 쓴다 바둥거리고 살아봐야 장모님 발톱만큼도 못 따라간다. 아내가 관리하는 장모님 통장잔고는 계속 늘어만 가는데 우리 계좌는 늘 답보상태. 여기가 진짜 신기한 지점이다. 안 쓰고 사시는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모으시는 거지? 무슨 요술 통장도 아니고 말이지.

장모님은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과즐(전통 한과) 집 아르바이트로 몸을 불사르신다. 과즐은 보통 명절 한 달 전부터 생산을 시작한다. 신정, 구정, 추석까지 일 년에 최소 세 달은 정신없이 바쁘다. 원래도 바빴던 과즐 집은, 매스컴을 타면서 더 유명해졌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TV 속 화면에서 연예인과 인사를 나누는 장모님을 보게 될 줄이야.

맡은 일은 누가 보든 안보든 자기 성에 차도록 해야 하고, 빠르고 깔끔한 성격 탓에, 따로 차를 보내 출퇴근시켜줄 만큼 업계에서 인정받으셨다. 이름 난 과즐 집에서 서로 스카우트하려 할 만큼 유능한 인싸이시다.


지금은 바쁜 스케줄을 자랑하는 장모님도 우울증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친구들이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면 걱정부터 하게 되더라고, 계속 얻어먹기만 했으니 이번엔 내가 사야 할 텐데. 일이 없으니 자신감도 떨어지고 자꾸 사람을 피하게 되더라."

나 역시 같은 상황을 겪어본지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에 와서 민박집을 운영하지만 직장인 시절에 비하면 벌이가 절반으로 줄었다. 단 한 번도 가족들과 부모님 앞에 쪼그라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괜히 위축되고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했다. 별 이유 없이 우울하고, 사소한 말에도 상처를 입었다.

마음의 면역력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능력껏 번 돈으로 친구들과 여행 다녀오고, 사고 싶은 물건들 사고, 자식들 오면 기분 좋게 베풀고.

이것이 절대 소박한 꿈이 아니란 걸 알기에 우리 장모님이 한없이 멋져 보인다.

장모님 같은 인싸가 되려면 체력부터 키워야 할 것 같다. 당뇨는 물론이요, 혈압약도 안 드시는데 병을 달고 사는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아침 일찍 요가원 가서 비틀고, 수목원 걷기도 하고 있으니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건 그렇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머니, 좌욕기는 다음에 제가 가져다 잘 쓰겠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거 사드릴게요. 사랑해요~^^."


장모님이 우리 중에 제일 건강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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