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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Nov 30. 2022

우영우가 반할 책방

강릉 고래 책방

고속도로의 끝, 저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는 진입로에 들어섰다.

"오빠, 집에 가면 엄마 있으니까 수민이 잠깐 맡기고 우리끼리 나갔다 오자, 올 때 먹을 것도 좀 사고."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건가. 1년여 만에 방문해서는 딸자식 맡겨 놓고 나갈 궁리부터 하다니. 하지만 뭐 어때, 장모님은 쑴만 있음 만사 오케이. 애타게 기다린 건 우리가 아닐 테니. 죄송한 마음은 잠깐 뒤로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로 했다.


눈에 불을 켜고 인스타그램을 돌리던 니콜이 보물이라도 찾은 듯 말했다.

"오빠 여기, 이름이 고래 책방이래. 베이커리 카페도 같이하고 규모도 꽤 커 보이네."

"우영우가 좋아하는 그 고래?"

"로고에 고래가 있는 거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암튼 여기다. 우리가 좋아하는 거 다 있네. 빵, 커피, 책."

장거리 운전 탓에 커피가 간절했지만,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빵. 사진 속에는 계란물을 발라 반질반질 윤이나는 단팥빵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단팥과 생크림의 만남이라니 참을 수 없어져 버렸다. 책 따위 어떻든 모르겠고, 일단 저걸 먹어야겠어.


장모님은 금지옥엽 외동 손녀를 부둥켜안고 우쭈쭈 신이 나셨다. 쑴 역시  깔끔한 아파트와 종류별로 쌓여 있는 라면이 맘에 드는지 정신이 혼미한 상태다. 잠시 나갔다 온다는 말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쓸데없이 미안했던 거지? ^^;

책방 입구에 선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뭐, 뭐지. 여기 엄청 크잖아! 인스타그램 사진 몇 장으로 머릿속에 그려낸 책방의 이미지는 와르르 무너졌다. 동네책방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세련되고 큰 빌딩, 강릉의 교보문고 인가.

2019년 경에 오픈했다는데 매년 강릉에 왔던 우리는 왜 여태껏 몰랐던 걸까. 하긴 우리 동네 핫플도 다른 사람에게 건너 듣고 가는 우린데 뭘 더 바라겠나(그 핫플은 집에서 도보로 3분 거리였다).


고래 책방의 영문 표기는 GO.re Bookstore, GO(가다), re(다시)라는 의미로 다시 가보자는 뜻이라고 한다.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만이 아닌 전시와 북 토크, 공연 등,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규모는 훨씬 훨씬 작지만 우리가 꿈꾸는 책방의 모습인지라 둘러보는 내내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특히 주제를 잡아 구성한 섹션이 눈에 띈다. 박경리 작가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연필 세밀화로 묘사한 작가의 초상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TV와 매스컴에서 워낙 많이 다룬 인물이라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박경리 작가뿐 아니라, 서점에서 엄선한 강릉 출신 문인들의 작품들을 전시 판매하는 공간이다. 노벨상을 꿈꾸는 강릉의 딸, 니콜의 의지가 불타오른다.

2층 공간은 아이들을 배려한 서점지기의 마음이 듬뿍 담겨있다. 유리벽으로 개방감을 준 중앙 공간에는 아이들을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비치되어 있고, 사인펜과 예쁜 도안이 인쇄된 셀로판지가 준비되어 있다. 유리벽 가득히 걸린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드문드문 어른들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 보인다. 남자 친구와 여행 중 들른 사람. 홀로 책방 투어를 하다 들른 사람. 각자의 사연을 담은 그림들이 빈틈없이 벽을 채우고 있다.

필사의 힘 코너는 우리 북 스테이 공간에서 시도해 볼 만한 아이디어라 특별히 찜 콩. 고래 관련 동화책과 로고가 인쇄된 굿즈 코너도 좋았다.

웬만해서는 좋은 티를 안내는 니콜도 고래 책방과 사랑에 빠진 표정이다. '오빠는 알아서 구경해.'라는 말을 끝으로 종횡무진하더니 어느새 가슴팍에 여러 권의 책을 안고 있다.

책방의 기운이 우리의 장운동을 촉진시켰는지 교대로 화장실에 다녀왔다(사장님 죄송합니다). 구석구석 제대로 둘러보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 같았지만 장모님과 쑴 생각에 서둘러 책과 빵을 골라 카운터로 향했다. 니콜이 책에 진심이라면 난 빵에 진심이다. 책을 고를 때는 니콜에게 권한을 위임하지만 빵의 결정권은 내게 있다. 실제로 내가 고른 빵은 대부분 맛있다.

카운터에서 맞이한 사장님이 계산하는 동안 나의 오지랖이 발동했다.

"저희는 제주에서 왔고요. 근데 이 친구는 강릉사람이고요. 이런 멋진 책방이 있는 줄 몰랐고, 앞으로 매번 오겠습니다. 근데 언제 오픈하신 거지요?"

사장님은 친절한 미소로 답하신 후 서비스로 페이스트리를 하나 넣어주셨다. 이런 걸 바라고 말을 건넨 건 아니었지만, 엎드려 충성하겠습니다.


아름답다

8년 전 서울을 떠날 때 제주와 함께 저울질하던 곳이 강릉이다. 고향인 대전도 생각해 봤지만 워낙 노잼 도시로 유명한 곳이라 딱히 할 일이 없다. 반면 커피로 유명세를 타던 강릉에서 게스트하우스 같은 걸 하면 먹고살만할 것 같았다. 장모님께 우리 의견을 여쭸을 때, 시원하게 돌아온 답변은 '여기 오면 할 거 없어, 굶어 죽어.' 성수기 잠깐 빼고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


그 당시에는 맞는 말씀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자고 나면 핫 플레이스가 생기는 곳이 강릉이다. 턱 없이 비싼 땅 값과 높은 물가 탓에 제주 이주를 꿈꾸던 젊은이들이 강릉을 찾고 있다.

제주만큼은 아니지만 동네책방도 늘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주문진의 '동아서점',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강동면의 '이스트 씨네', 교동 짬뽕 먹고 가면 딱 좋은 코스 교동의 '한낮의 바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영우가 반할 서점 '고래 책방'까지.


가끔 제주가 아닌 강릉행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든다.

'아니야 제주 오길 잘했어. 1년에 한 번 씩이 딱 좋아. 살아버리면 다 사라질 거야. 커피도, 바다도, 책방도,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될 테니까. 그렇게 꿈꾸던 제주가 이런데, 강릉이라고 다를까.'

앞으로도 강릉은 특별한 책방이 있는 곳, 시퍼런 바다가 있는 곳, 바다에 어울리는 커피가 있는 곳으로 남겨 두고 싶다. 일상에 지쳐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 꺼내어 보는 사진첩 같은 곳, 늘 그리운 장모님이 계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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