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떠오른 상처의 오래된 기억
칼 융이 말한 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치유받지 못한다는 것. 그저 놓아줄 뿐이라는 것.
우리는 흉터를 보면서
자신이 상처를 극복했음을 알 수도 있고,
흉터를 보면서 상처 입은 일을 기억할 수도 있다.
새벽 요가수련을 하러 갔다. 찻잔에 차를 따라 앞에 놓고 나는 제일 먼저 오른손가락으로 왼 손바닥을 문지른다. 손바닥에 새겨진 대문자 'J'. 정확히는 'J'의 갈고리 방향이 반대로 휜 모양의 흉터다. 이 흉터가 생긴 지는 20년도 넘었지만 손바닥을 쫙 펼 때면 여전히 피부가 바짝 땅긴다. 나는 이 상처를 극복했을까?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맨발로 타일바닥 위에 서 있던 나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순간 중심을 읽었고 꽈당 넘어졌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하필 그 자리에 쓰고 씻어 둔 도자기 그릇이 있었고, 내 왼손은 정확히 그릇을 두 동강으로 격파했다. 손바닥을 보려고 손을 들어 올리니 그릇 조각이 단면이 쓱 하고 손바닥에서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그 뒤로 시뻘건 피도 솟구쳤다. 난 홀딱 벗은 채로 119에 신고를 했다. 피를 멈추려고 손바닥에 올려놓은 수건 하나는 금세 빨갛게 물이 들었다. 입술이 벌벌 떨렸다.
그렇게 병원에 실려가 전신마취 후 수술을 받고 한 달여간의 입원 생활을 끝내고 일상을 복귀했다. 그다음은 재활의 시간이었다. 처음엔 손가락 한마디도 구부리지 못했다. 이렇게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건가,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하루하루 재활을 거듭할수록 손가락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이후 날이 흐리면 상처 부위가 욱신거리고 가끔 손가락 신경이 찌릿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생활에 전혀 불편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상처를 극복했다.
...고 생각했다.
사무실 생활을 하며 가장 힘든 것은 어깨 통증이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직업병이라고 하지만 특히 왼쪽 어깨와 겨드랑이 부근 통증은 견디기 힘들었다. 요가, 필라테스, PT 안 해 본 게 없다. PT에서 팔 운동을 하던 어느 날, 트레이너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왼쪽 새끼손가락을 전혀 쓰지 않으시네요."
어? 그런가? 마음의 눈이 어느새 왼쪽 손가락을 향했다. 그 순간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수많은 장면들의 필름이 거꾸로 감기면서 사고가 난 그날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의 왼손, J와는 갈고리 방향이 반대의 왼손의 상처. 그렇다. 나는 그 사고 이후 왼손 새끼손가락을 아예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봤다. 그러고 보니 새끼손가락에 거의 감각이 없었다. 이걸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
상처 부위만 본다면 다 치료되었지만, 그 상처를 인해 나는 고통스러운 쪽으로 힘을 쓰기를 피했다. 요가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은 다섯 손가락 중 잡아당기는 힘이 가장 센 것이 '새끼손가락'이다. 나는 그 손가락을 20년 넘게 쓰지 않았고 새끼손가락과 연결된 팔 근육과 어깨 근육이 점점 짧아지고 퇴화했던 것. 지금 나의 통증의 원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처참했다. 너무나도 무난하게 상처를 극복한 줄 알았었는데, 그때의 일 따위 금방 잊고 잘 살 수 있을 줄로 생각했는데...
류시화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2023)』에서 저 글귀를 읽는 순간 터져 나온 생각들이다. 이렇게 털어놓았으니, 나는 이 상처를 비로소 놓아줄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