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아이와 함께 눈놀이를 하다가 떠오른 생각
나에게 새해 첫날은 1월 2일에 더 가깝다. 남들은 1일 아침에 일출을 보러 가네 새로운 계획을 실천하네 부지런을 떨지만, 20년 차 직장인에게는 그저 늦잠을 잘 수 있는 하루가 더 생겼다는 의미가 더 크다.
1월 2일, 새해 첫 출근길은 험난했다. 올 겨울 제주 시내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이었다. 그럼에도 첫날이기에 거북이 운전을 해가며 새벽 요가를 다녀왔고 이른 아침 출근을 했다. 문제는 아이 케어였다. 방학 중인 아이를 학원을 돌려가며 겨우겨우 업무를 하고 있는데, 이 날은 차량 운행이 멈췄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휴가를 내기로 했다. 마무리해야 할 업무들을 싸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학원에 보낸 뒤 처리할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온 세상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았다. 동네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오전 10시가 넘었는데도 새하얀 눈이 그대로 이불처럼 펼쳐진 곳이 많았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이에게 외쳤다. "얼른 옷 입고 눈썰매 타러 나가자!" 엄마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가 놀자는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던지라, 아이는 잠시 멍한 듯 있더니 금세 옷을 챙겨 입었다. 플라스틱 썰매를 꺼내고 깊숙이 박혀 있던 부츠도 꺼내 신었다.
"이제 출발!"
최대한 발자국이 남지 않은 길로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 연신 소리를 지른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썰매를 잡지도 않고 두 손으로는 바닥 눈을 쓸어 담는다. 저러다 넘어질라, 저러다 땅에 있는 뾰족한 거라도 손에 찔리면 어쩌지, 장갑이 남아나질 않겠네... 짧은 순간에 내 머리에는 수많은 걱정이 스쳐갔다.
하필 내가 택한 길은 오르막이었다. 눈길이라 썰매가 쉽게 끌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하니 힘이 들었다. 그래도 이 한 몸 썰매개가 되어 아이가 기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계속 썰매를 끌었다. 그래, 네가 없었다면 내가 언제 썰매개의 입장이 되어 보겠니.
30분쯤 놀고 나서 이제 집으로 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아이는 이제 막 몸이 풀렸다는 듯 눈사람 만들 준비를 했다. 그렇지. 언제나 아이와 나의 놀이 타이밍은 이렇게나 달랐다.
아이는 어느새 눈사람 몸통을 만들어서 집 출입구 앞에 세워 놓았다. 행여나 눈사람이 넘어질까 벽에 바짝 기대어 빈틈을 눈으로 메워 나갔다. "난 몸통을 고정하고 있을 테니까 엄마는 얼굴을 만들어 줘." 아이의 지시대로 난 눈을 굴려 대충 원형에 가까운 찌그러진 머리통을 만들었다.
이제 허전한 얼음 덩어리에 장식을 할 시간. 주변엔 아무런 소품이 없었다. 겨우 찾은 나뭇가지 두 개로 팔을 만들고 조그만 돌멩이로 두 눈을, 겨울에도 빨갛게 열린 열매 하나를 코 위치에 콕콕 박았다. 남들은 눈사람을 예쁘게도 만들던데 나는 이거 하나 제대로 못하는구나, 자책하면서.
그렇게 눈사람 하나가 뚝딱, 완성됐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지 않아서인지 이 날 내린 눈은 다음날 아침 모두 사라졌다. 눈사람도 한 주먹 정도의 얼음만 남고 완전히 녹아 버렸다.
눈을 굴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걸 만들어봤자 금방 녹고 말 텐데,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들 중 쓸데없지 않은 일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내가 시간을 움켜쥐고 그것에서 효용을 쥐어짜 내려는 매우 어리석은 태도에서 비롯된다.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지,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내 인생이 흘러가도록 내 몸을 맡길지는 나의 선택이다. 나는 올해 시간과 함께 흘러가보는 훈련을 해볼 참이다. 그리고 새해 계획을 세워본다.
뭘 하든지 해보자! 잘 해내겠다는 힘을 완전히 빼고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 못할 일이 뭐 있나. 이렇게 눈사람 하나 만들 정도의 의지가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못하면 또 어떤가. 이 눈사람만큼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흘러갈 일이고 녹아내릴 것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미련을 두지 말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오히려 더욱 기운이 솟아난다. 눈사람은 전혀 쓸데없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