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 리더과정-4강] 논제 만들기와 진행 실습
나의 첫 진행 실습 날이다. 진행자는 총 네 개의 논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하며 이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 이 중 두 개의 논제를 선택해 토론 진행을 실습해 보는 시간. 다들 처음 배우는 입장이기에 잘할 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잘해야 하는 압박도 없었지만 나는 수업 전까지 마음으로 끙끙 앓았다. 다른 어떤 일도 집중하지 못하고 토론 상황만 반복 상상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가 진행할 토론의 도서는 <달과 6펜스>. 그야말로 고전. 작가와 책 제목을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내용에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책이다. 그런데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은 앞으로 내 인생의 책 중 하나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다른 수강생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역시 고전의 힘은 크고 묵직했다.
지난 시간에도 논제를 만들어 봤지만 진행자를 한다는 마음으로 만들 때와는 또 자세가 조금은 달라졌다.
논제 만들기-한 책 두 번 읽기! 감동이 클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좋은 작품은 등장인물의 성격이 매우 복합적이다. <달과 6펜스>가 대표적인데, 그래서인지 모든 인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가 실망을 느끼고 그래도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그 인물에게 손을 내미는 나 자신이 보였다.
나의 흥분과 감동을 당장에라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시시콜콜하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데 논제를 만들 때는 이런 감정을 덜어내야 한다. 감정에 휘말린 채로 논제를 만드는 것은 마치 술에 취한 밤 애인에게 쓴 편지와 같다. 다음날 이것을 보면 내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뒤범벅되어 이제 와서 고칠 수도 활용할 수도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논제를 만들 때 최소한 책을 두 번은 읽으라고 하셨다. 처음 읽을 때는 훑어보듯이, 그다음은 꼼꼼히 읽으면서 논제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의 책을 여러 번 읽을 만큼 시간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처음 읽을 때 제대로 집중만 한다면 굳이 두 번 읽는 수고 없이 밑줄이나 메모 부분만 보고도 충분히 논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논제를 만들면서 두 번 읽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처음 읽는 것은 ‘나만을 위한 독서’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내가 읽는 방식으로 다소 속도를 내어가며 진도를 뺀다. 그렇게 읽으면 내용의 흐름에 올라타 나만의 재미에 푹 빠져들 수 있다. 한 번의 독서로 나만의 독서를 마치고 나면 두 번째 독서에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새로운 영감을 받거나 등장인문에 충격을 받는 등의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대신 책의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에 에너지를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으니 내용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한 책 두 번 읽기는 2~3권 정도에 적용해 봤을 뿐인데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시간이 아깝다는 것은 물리적 권수에 집착했을 때의 생각일 뿐, 이제는 책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거꾸로도 뒤집어 보며 어루만지는 재미에 빠졌다. 그러면서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책의 물성도 느껴본다. 새로운 독서 습관이 생겨난 것이다.
토론 진행-진행자는 그저 공을 띄워주는 역할일 뿐
부지런히 만든 논제로 이제 토론을 하는 시간. 진행자자 논제를 읽고 참가자들에게 발췌문을 낭독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달라고.
이제부터는 참가자들의 시간이다. 나는 그저 말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발표라는 공을 살포시 토스해 줄 뿐이다. 공을 받은 사람은 신나게 공놀이를 하다가 말이 끝나면 공을 내게 다시 넘겨준다. 이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나는 공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 나도 그렇게 놀 수 있어. 나랑 같이 공놀이할래? 상대방의 말에 흥이 발동해 진행자가 공을 가지고 놀면 그때부터 토론은 제대로 될 수 없다. 진행자는 그저 건네받은 공을 다른 사람이 잘 가지고 놀 수 있도록 매만지는 정도로 공을 다루면 충분하다. 오래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된다. 바로 다음 공놀이 참여자에게 공을 토스해 주고 그의 놀이를 함께 감상하면 된다.
실습이 끝나고 나서 세 가지 피드백을 받았다. 하나, 내가 경청을 잘하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 엥? 그것이 비대면으로도 확인이 된다 말인가? 하지만 어떤 평가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여태까지 말을 잘하는 사람, 애드리브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주변 평가에 익숙했고 성격이 급해 스스로도 남의 말을 중간에 자르는 습관을 고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나의 경청 태도를 발견해 주신 선생님의 말씀이 앞으로 내 토론 진행에 큰 전환점이 될 것 같다.
둘, 내가 누군가의 말을 정리하며 그 말에 대한 평가를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진행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주장을 하거나 참가자 의견에 판단 섞인 의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이 부분 또한 굉장히 의식해서 하지 않아 보려 노력했지만 평소 습관대로 나온 발언이었다. 나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세계를 재단하려는 무의식의 발로. 진행자는 의견도 판단도 하지 말고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의 대부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셋, 토론 진행 책인 <달과 6펜스>는 폴 고갱의 삶을 모티브를 한 소설이다. 다 읽고 나면 자연스레 폴 고갱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데, 이에 대한 정보를 나누기 위해 폴 고갱 전기와 편지 에세이 책을 추가로 소개했다. 선생님은 토론과 관련 있는 추가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은 토론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진행자의 전문성도 돋보이게 하는 좋은 요소라고 칭찬해 주셨다. 위에 비유했듯이 이 요소는 진행자가 공놀이의 더욱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여러 형태의 공으로도 함께 놀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행자는 논제를 만들고 난 후에도 더 공부하고 찾아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느꼈다.
어떠한 공이든 그 공에 맞는 게임의 규칙이 있다. 토론의 진행자는 농구에서 가드, 배구에서 세터, 축구에서 미드필더와 같은 역할을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게 해내야 한다. 공이 어디로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토론 참가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