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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07. 2016

어머니와 대통령

정치와 정치인의 책무에 대하여

1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머니께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불쌍히 여기신다. 박 대통령은 당신에게 양친을 불운하게 잃은 비련의 주인공이다.


2012년 제18대 대선 국면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이었다.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나온 박근혜의 한계와 문제를 말씀드린 적이 있다. 평소 장성한 아들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귀담아듣는 분이셨다. 그날은 노골적으로(!) 먼산바라기를 하셨다. 그해 말 투표장에 가셨다면(당시 몸이 불편해 집에서 요양 중이셨다.) 박근혜에게 표를 던지셨을 것이다.


몇 년 전 <밀양을 살다>(밀양구술프로젝트팀 지음, 한티재, 2014)라는 책에서 만난, 당시 연세 86세인 김말해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뒤로 100여미터나 되는 ‘괴물’ 송전탑이 들어선 밀양의 깊은 산골 마을에서 홀로 살아가시던 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대동아 전쟁기와 극우 반공 시대를 거쳐오셨다. 격동하는 역사가 개인의 삶에 가져오는 파탄과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셨다.

그래서였을까. 2012년 대선 당시 김 할머니는 박 근혜에 대한 강력한 심정적 지지자였다. 박근혜를 떠올리며 “지 애미 지 애비 그래 죽었다고 불쌍타코 한 번 돼야 될 낀데.” 하는 바람을 가슴 한켠에 진득히 품고 계셨다.


김 할머니는 역사의 격동을 온몸으로 헤쳐온 박근혜가, 바로 그런 경험을 통해 얻었을 뛰어난 ‘공감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짐작컨대 김 할머니는 그해 대선 투표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지셨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와 김말해 할머니 같은 분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있었다. 그 분들 표 하나하나가 모여 1577만여 장(전체의 51.6퍼센트)이 되었을 것이다. 간절함의 차이야 있었겠지만 그들 모두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제2의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를 펼치길 바라지 않았을까. 지난날보다 조금 더 잘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가슴에 품은 채 말이다.


박근혜 정권 출범기였던 2013년 대통령의 ‘국정 메시지’는 “희망의 새 시대 국민이 행복한 나라”였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며 많은 사람이 비판하고 우려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한 사람들을 포함해 반대편에 선 대다수 국민들은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리라.     


‘나아지겠지.’     


2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세 끼 밥 먹고, 적당한 수준에서 교양과 문화를 접하며,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어울리면서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 내 삶이 타인을 방해하지 않고, 타인의 말과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바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닐까.


‘호미니드(Hominid)’, 곧 인간 종 자체가 그렇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9퍼센트 일치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나머지 1퍼센트 차이가 언어와 종교와 추상적 사고 등의 유무를 결정한다.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거작 <정치질서의 기원>에서 ‘침팬지 정치’라는 인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영장류 동물학자들은 침팬지와 다른 영장류의 행동 방식을 오랫동안 관찰해왔다. 그 결과 인간의 행동 방식과 놀랄 만한 연관성을 갖는 침팬지의 행동 방식을 발견했다고 한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침팬지는 수컷과 암컷이 가족을 이루어 새끼를 키우지 않고 수컷과 암컷이 각각 서열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서열 속에서 벌어지는 지배의 정치를 보면 인간 집단의 정치가 상기된다고 적었다.


후쿠야마는 침팬지 행동 방식과 인간의 정치 발전 사이의 관련성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인간과 침팬지 모두 공통된 원숭이 조상을 가진 점, 서로 비슷한 형태의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 들을 근거로 들었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인류의 전 단계인 영장류부터 벌써 사회적인, 그리고 분명 정치적인 기술을 보유했으며 인간의 뇌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협력을 강화하는 능력을 갖췄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2012), <정치질서의 기원>, 웅진지식하우스, 54쪽.     


3     


후쿠야마 식 관점에 따르면 정치와 정치체제는 인간에게 본능에 가까운 것 같다. 특이한 점은 인위적인 개입 없이도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여느 본능 기제들과 달리 정치는 인간의 개입을 필요로 하며, 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변하는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바꿔나가는 자동 메커니즘 같은 정치체제는 없다.” - 위의 책, 31쪽.    

 

그것은 둘 중 하나의 길을 따른다. 발전하거나, 쇠퇴한다.


후쿠야마가 든 흥미로운 예 하나를 들어 보자. 맘루크 왕조는 12세기 말과 13세기 초 이집트와 시리아를 짧게 다스린 쿠르드계 아이유브 왕조 말기에 창설되었다. 16세기 초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당했다.


표면적으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외세의 위협이 닥치기 전에 화약 무기를 도입할 기회가 있었다. 오스만은 화기 도입에 유연한 입장이었다. 화약 무기가 갖는 유용성이 유럽인들에 의해 입증된 지 한참 지난 뒤였다. 맘루크는 화기를 도입하지 않았다. 기병대라는 과거의 규칙(규범)에 대한 애착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구조적인 요인이 있었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맘루크는 국가의 기관으로 남기보다 스스로 권력을 잡았다. 그들을 제어할 책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맘루크 개개인은 스스로 술탄이 되려는 야심을 품을 수 있었고, 권력 다툼에 날을 지새게 되었다.      


왕조적 원칙은 일찍부터 다시 뿌리를 내렸고, 고위층에서는, 그리고 곧 모든 맘루크 상위 계급에서, 세습 귀족주의가 자리를 잡아버렸다. 동시에, 이들 엘리트는 재산권 보장을 확실히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어떻게 재산을 술탄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기 자손들에게 빼돌릴지를 두고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했다. (중략) 엘리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평민들에게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자원을 갈취했다. 맘루크 엘리트들은 이런 권력 다툼에 하도 몰입한 나머지 외교정책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 위의 책, 248쪽.   

  

4     


‘나아지겠지.’     


유감스럽게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질 수 없었다.


후쿠야마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지금 “민주주의 세계에 돌고 있는 돌림병”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지난 수십 년간 이룬 민주개혁 성과가 완전히 뒤집혀버린, 매우 심각한 돌림병에 걸린.


이 돌림병에 걸린 나라에서는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부정선거를 한다고 한다. 티브이나 신문을 폐쇄하거나 매입하여 언론을 장악하고, 야당을 탄압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후쿠야마는 러시아, 베네수엘라, 이란을 들었다. 2016년의 대한민국을 포함하면 지나칠까.


후쿠야마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는 선거에서 다수표를 획득한 쪽을 뽑는 일이 전부가 아니다. 법과 견제-균형 시스템에 따라 권력을 억제하고 규제하려는 복합적인 제도가 자유민주주의라고 보았다. 그런데 민주개혁 성과가 뒤집힌 나라에서는 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등에 업은 권력들이 권력 집행에 대한 견제 시스템을 없애고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


다시 강조하자. 정치제도의 발전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후쿠야마는 정치제도의 발전 과정이 인간 사회가 환경에 적응해 스스로를 조직해나가는 분투의 과정이라고 묘사했다. 정치체제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을 때 ‘정치 쇠퇴’나 ‘정치적 타락’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마치 ‘제도 보존의 법칙’ 같은 것이 작용한다. 사람은 본래 규칙을 따르는 동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둘러싼 사회규범에 순응하게 되어 있으며, 종종 그런 규범에 초월적인 의미와 가치마저 부여한다. 그런데 주변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도전이 나타나면 종종 기존의 제도와 당면한 필요성 사이에 갈등이 나타난다. 그리고 기존의 제도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옹호를 받으며 근본적인 변화에 저항한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2012), <정치질서의 기원>, 웅진지식하우스, 28~29쪽.     


나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선거에서 내건 약속을 충실히 지키기를 바랐다. 합법적 정부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정권이 되기를 바랐다. 정부와 정권이 국민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 정권을 지탱하는 ‘힘’들은 변화에 강력히 저항하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로 역진하는 우리 정치가 온 나라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몰아넣고 있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급기야 ‘전쟁’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침묵을 지키며 ‘나아지겠지’ 하고 바란 대가의 끝이 너무 크고 무섭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맘루크 왕조의 병사들이다. 다음(Daum) 카페(http://cafe.daum.net/animallike/CN/2259?q=%B8%BE%B7%E7%C5%A9%20%BF%D5%C1%B6)에서 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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