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Oct 07. 2016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21)

1     


몇 년 전, 서울에서 온 손님 한 분과 저녁을 함께했을 때가 기억 난다. 알찬 인문학 책을 제법 내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분이셨다. 교육과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바래지기 바쁘게 전년도 대학 진학 실적을 적은 펼침막을 업데이트하는 학교, 초청한 외부 손님 특강이 현실 논리에 안 맞는다며 삿대질하는 교사, 제대로 된 시집 한 권 읽지 않고 교직에 입문한 젊은 국어 교사가 입길에 올랐다.


그날 대화의 압권은 ‘양계장’이었다. 어느 교사가 학교를 그렇게 빗댔다고 한다. 군대, 병영, 내무반을 즐겨(?) 쓰던 내게 양계장은 낯설었다. 아무려나 그 정도까지야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교 시스템 내부자의 자위적인 시선도 작용했으리라.    

  

2     


양계장이 어떤 곳인가. 닭들은 오로지 알을 낳거나 사람에게 먹히기 위한 목적으로 길러진다. 이익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을 기본으로 한다. 닭들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한 치 빈 틈 없는 사각의 공간, 고효율 사료가 쓰인다. 생명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된다.


닭들은 철저하게 선별된다. 유정란을 낳는 닭과 무정란을 낳는 닭이 갈린다. 석 달 된 닭과 넉 달 된 닭이 나뉜다. 육계용 닭과 알을 낳는 닭이 구별된다. 병든 닭과 그렇지 않은 닭은 철저히 가른다. 밀집 공간에서 살기 때문에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양계장 같은 학교 시스템은 차등적인 학교 구별에서부터 시작된다. 상위 1퍼센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들이 있다. 국제학교, 자사고, 특목고 들이다. 나머지 99퍼센트는 일반학교에 다닌다. 하위 50%는 상위 50%에 오르려고 발버둥친다. 상위 50%는 하위 50%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라린다.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경쟁한다. 배려와 협력와 연대를 꿈꾸기 힘들다.


아이들이 선별된다. 수치화한 성적이 동원된다. 점수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방출된다.


최근 몇 년 간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6만여 명 전후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고등학생이 2만 명 대다. 병 든 닭들이 격리되고 소각되는 것처럼, 아이들이 ‘학교 부적응아’나 ‘문제 학생’ 꼬리표를 달고 학교에서 내쫓긴다.     


3     


이제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들은 교사나 교과서가 던져주는 잡다한 지식을 사료처럼 받아 먹는다. 삶에 지혜를 더해주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양계장에 갇힌 닭은 본능적으로 사료를 쪼아 먹는다. 아이들 역시 ‘생존’을 위해 지식을 받아먹는다. 입시에 종속된 수업은 문제 풀이 기술을 익히는 기계 공정을 따른다. 교사들은 팍팍한 세상을 핑계로 현실에서 뒤처지지 않는 처세와 영악함을 가지라고 아이들을 다그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교육은 ‘전쟁’이다. 한두 번 격하게 치르는 ‘전투’가 아니다. 흔히 공부와 학습이 ‘전술’이 아니라 ‘전략’으로 비유되는 까닭이다. 친구는 기본적으로 ‘적’이 된다. ‘전술적으로’ 이용 가치가 있다면 활용해야 할 대상이 된다. 교사는 전투 보조원쯤 될까. 교사들 스스로 그런 구실을 기꺼이 맡는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학교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배움의 터전이어야 하지 않을까. 험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을 감싸주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양계장 학교는 낯설다. 전쟁이나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 같은 교사는 무섭다. 존 테일러 개토(John Taylor Gatto)가 이렇게 물었다.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4     


아이들은 ‘양계장’에서 12년을 산다. 대학을 합하면 16년이다. 9년은 의무교육과정이다. 강제적이다. 이유가 뭘까. 전인격체적인 주체의 완성? 민주 시민으로 기르기 위해서?


맞다. 표면적으로 그렇다. 속셈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국가와 회사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한 사회의 법과 질서를 고분고분 잘 따르는 ‘노예’ 기르기와 같은 것 말이다. 나는 학교가 ‘적당히’와 ‘평균적으로’를 강조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의 학교가 길러내려고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독일 철학자 피히테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 규정한, 이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 길러내야 하는 다섯 가지 인간상 중 마지막이다. 학교 제도가 아이들의 개성을 뿌리뽑게 된 연유,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지 않는 까닭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고, 결국 바보가 된다!     


5     


국가와 학교와 교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개토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배우는 방식이나 어떤 공부가 값진 것인지를 올바르게 밝힌 이론이 없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치 이런 게 있다는 식으로 꾸며내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시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과 혁신에서 멀어져 온 것입니다. - 존 테일러 개토(2011), <바보 만들기>, 민들레, 58~59쪽.     


그날 우리는 양계장 이야기 끝에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이나 희망이라는 말이 지천에 널린 세상을 이구동성으로 개탄했다. 현실적인 기대나 욕심을 꿈이나 희망으로 부풀리고 있는 이들을 일갈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민들레 새싹처럼, 불가능에서 가능을 일구는 게 진정한 꿈과 희망 아닌가.”


자리를 함께한 동료 선생님 말이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작가의 이전글 학교를 ‘편의점’처럼 여기는 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