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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06. 2016

학교를 ‘편의점’처럼 여기는 아이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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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고 은둔하는 청춘들이 늘고 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젊은 세대들의 문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과 동향, 교육제도, 정치․사회적인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근인을 찾아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일본 교육 운동가 우치다 타츠루는 몇 년 전 펴낸 <하류 지향>에서 ‘공부로부터 도피하기’와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과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등의 제목이 붙은 3개 장을 통해 통해 이 문제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그는 어른들이 경제성과 합리성을 동기로 부여해서 아이들을 학습의 길로 이끄는 행태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들은 “공부를 하면 이런저런 좋은 점이 있단다” 하면서 아이들을 실용적으로 유도한다. 공부를 하면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존경받는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높은 연봉을 받고, 수준 높은 이성을 배우자로 맞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 우치다 타츠루(2013), <하류 지향>, 민들레,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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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감이 느껴진다. 대다수가 ‘김고삼’(고등학교 3학년을 풍자적으로 일컫는 표현)인 학생들을 향해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수능 때까지 죽자사자 공부하고, 연애과 여행과 취미생활과 독서는 그뒤에 맘껏 하거라.” 자발적인 ‘연애’와 ‘여행’과 ‘취미생활’과 ‘독서’야말로 진짜 공부의 시발점이다. 어른들은 그것을 유예시킨다.


일본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중학생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요?” 이것은 “왜 공부해야 하나요?”와 같은 성격의 질문이다.


우치다는 공부하는 것이 ‘권리’라고 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런 도덕률이 무의미하게 작동하는 시스템 아래에서라면, ‘나’ 자신이 언제든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둘 모두 우리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예의 질문들은 그런 권리와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한다.


나는 사회와 어른들 책임이 크다고 말하고 싶다. 수십 년 전 아이들은 노동을 통해 사회관계망 안에 처음 들어섰다. 아이들은 심부름 같은 자잘한 가사노동을 통해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다졌다. 요새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됐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하거라.”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한다. 우치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능감이 넘치는 소비 주체”라는 외피를 껴입는다. 이제 아이들은 상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련한 협상술을 발휘한다.


“그건 별로 좋지 않군요. 난 그거 필요 없어요.”


“공부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공부는 해야 하는 법. 교사와 부모는 이런저런 현실주의적인 논리를 들이댄다. “제발 공부 좀 해 줘”라고 하소연한다. 아이들은 마지못해 공부를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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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주체로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치다의 논리를 빌려 말해 보자. 아이들에게 학교는 ‘편의점’ 같은 곳이 된다. 진정한 배움은 비가역적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존재의 변화 과정이다. 소비주체로 학교에 들어선 아이들은 배움의 쓸모와 현실적인 유용성을 찾으려 한다. 거래를 하려고 한다. 결정은 모두 자신의 것이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어떤 일의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이 바르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쓸모가 있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있고, 쓸모가 없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없다. (중략) 이 주장(자기결정 및 자기책임론)이 헐값게 미래를 팔아치우는 아이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다. - 우치다 타츠루(2013), 위의 책, 83쪽.     


자기결정과 자기책임론은 주체를 강하게 하는가. 우치다는 자기결정권을 신봉하는 이들이 리스크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무수한 후원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 그들은 자기결정권을 버리는 대신 촘촘한 네트워크의 돌봄을 통해 상층의 삶을 보장받는다.


사회적 약자는 반대다. 우치다는 이들이 극단적으로 말해 상부상조 조직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위험을 낮춰줘야 하는 국가나 가족 등 공동체는 그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벌거벗은 개인으로 고립무원인 사회에 맞서는 존재가 된다. 모든 것이 자기결정에 따른 자기 책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 우치다 타츠루(2013), 위의 책,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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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는 거대한 성과주의 시스템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맹목적인 능력주의가 사람들의 의식 세계 속을 파고들고 있다. 균등한 기회와 공정한 경쟁 과정과 합리적인 분배 체제가 마련되어 있다면 나름대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기제가 성과주의와 능력주의 시스템이다. 가능할까.


아이 기르고 가르치는 일을 생각해 보자.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상품 제조 과정과 다르다. 기계 설비에 원료를 투입하면 짧은 시간 안에 ‘표준화’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육아나 교육은 긴 시간이 걸린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아이가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현실은 다르게 굴러간다. 아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의 지필시험을 통해 자질과 능력을 ‘평가’받는다. 학교와 교사는 1년마다 ‘평가’의 대상이 된다. 우치다는 부모들조차 육아를 비즈니즈 관점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인 자식에게 어떤 부가가치를 덧붙였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부모들은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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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나와 있다. 부모는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도록 느긋하게 기다려 준다. 어렸을 때부터 자잘한 심부름을 시키면서 노동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이끈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스승’이 되도록 노력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우치다는 “그 자신이 또 스승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럴 때 무한으로 이어지는 긴 연결고리 속의 자신을 발견하고 교직에 대한 강렬한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많은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방향감을 잃은 채 헤매고 있다. 학교 교사들은 수시로 성과와 실적의 채근을 받는다. 모두 바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 빠져들고 있다. 이 세상이 문제임을 잘 안다. 스스로 먼저 나서서 바꿔보려는 몸짓을 내보이는 이는 흔치 않다. 갈수록 스스로를 좀먹는 시간을 보낸다. 죄수의 딜레마 같은 것이다. 빛나는 통찰과 영감,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생각들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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