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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05. 2016

우리에게는 ‘기절한 제비’가 몇이나 될까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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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고사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시험 공부에 여념이 없다. 학교시험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다. 열등생이든 우등생이든 학교 다니는 모든 아이들에게 시험은 ‘공적’이다. 음험한 악의 세력이자 어둠 그 자체다.

학창 시절 최악의 시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을 꾸어 보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디데이에 가까워올수록 시험은 짙은 어둠이 되어 아이들을 질식시킨다.


시험이 이런 취급을 받는 건 당연해 보인다. 배움 자체가 즐겁다면 시험 따위가 무슨 대수랴. 시험 문제를 푸는 일은 즐거운 배움의 기회를 한번 더 되풀이하는 것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다수 학교는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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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중·고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작가 다니엘 페낙이 쓴 <학교의 슬픔>이라는 책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그는 학교를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을 주는 곳으로 보았다. 슬픔은 배움을 가로막는 벽이다. 책 제목이 <학교의 슬픔>이 된 까닭이겠다.


페낙 자신이 알파벳 ‘a’를 외우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린 형편없는 열등생이었다. 아버지는 알파벳 글자 26개를 26년간 익히면 되겠다며 전폭적으로 격려(?)해 주었다. 그럼에도 페낙은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자기 부정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열등생의 속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열등함에 대해 굽이굽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한심해, 난 절대 할 수 없어. 그러니 노력해볼 필요도 없어, 이미 다 망했어, 내가 그랬잖아요,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중략) 열등생에게 학교는 출입이 금지된 몹시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때로는 몇몇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돕는다. - 다니엘 페낙(2014), <학교의 슬픔>, 문학동네, 25쪽.

    

페낙은 교사가 된 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에 몰두했다.

대다수 학교에는 페낙과 같은 교사들이 많지 않다. 문제아(?) 수가 학년 전체의 반 평균(?) 수보다 많은 학급의 담임교사는 분통을 터뜨리기 바쁘다. 재수가 없어 형편 없는 아이들로 가득찬 반을 맡았다는 이유를 댄다.


30명이 넘는 아이들과 1년 동안 지내다 보면 심각한 일 몇 건씩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학급이 한 학년에 대여섯 개 이상 되면 하루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드물다. 그때 문제를 일으킨 아이를 학교 밖으로 내쫓을 궁리를 하는 교사와 학교가 많다.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열등생이나 문제아 문제를 그런 식으로 풀 수 없다. 아이 문제는 대체로 부모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일 때가 많다. 부모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대체 이애가 뭐가 될까요”라는 질문이 있다. 배경이 있는 질문이다.

페낙은, 대다수 어머니(부모라고 해도 되겠다.)가 미래라는 강박적인 화폭에 현재를 투영해 그려놓은 것이 아이의 미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희망 없는 현재의 이미지가 비대하게 투영된 벽을 아이의 미래로 보는 것.


이제 거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힌 부모들은 아이들을 채근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아이들이 주눅이 든다. 열등생의 세계로 빠져들거나,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문제아 대열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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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부모의 바람이나 그 자신의 예상대로 되는 일은 흔치 않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뭔가가 되어간다는 것. 페낙의 말처럼 아이들은 ‘뭔가 된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학교와 교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젠가는 뭔가가 된다니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 마디, 믿음직한 어른의 말 한마디, 분명하고 안정적인 그 한마디면 충분히 그들의 슬픔을 녹여내고 마음을 가볍게 하여, 그들을 직설법 현재(있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지금, 여기의 일을 직접 말하는 방식. ‘현실’과 ‘현재’를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임)에 빈틈없이 정착시킬 수 있다. - 다니엘 페낙(2014), 위의 책, 81~82쪽.     


좌절하고 포기하는 아이에게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 마디”를 던질 줄 아는 교사를, 우리는 일본 교육 운동가 우치다 타츠루가 <스승은 있다>에서 쓴 ‘수수께끼 선생님’, 또는 ‘무지(無知)의 선생님’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제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지가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선생님, 그렇지만 ‘나’의 눈에 ‘나’를 사랑하고 관심의 시선을 준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교육 수요자’ 담론 덕분일까. 학부모와 아이들은 학교와 교실에 ‘고객’처럼 온다. 교사가 사랑이나 열정으로 무장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과 열정만으로 교사가 제대접을 받기 어려운 시대가 된 듯하다. 아이들은 영악하게도 ‘시장’이 들려주는 말들을 더 잘 따른다.


학교와 교실 주변에는 온갖 다양한 교육제도와 학교정책의 찌꺼기들이 쓰레기처럼 둥둥 떠나닌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져 온 문화와 우리들의 의식, 격동하는 정치·사회적인 흐름은 학교와 교사들을 질식시키기 일쑤다. 열정과 헌신은 불온시되고, 사랑은 오해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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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은 더욱 더 사랑과 열정으로 무장해야 하지 않을까. 열등생과 문제아와 학교 부적응 학생이 갈수록 늘어나고, 그 심각성이 크게 깊어지고 있다. 페낙은 <학교의 슬픔> 마지막에 교사와 학생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제비’ 메타포를 풀어 놓았다.


해마다 9월이면 페낙의 집에 남북으로 난 투명 유리창 부분을 통해 비행하려는 제비들이 날아든다고 한다. 그런데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혀 날개가 부러지거나 잠깐 기절하는 제비들이 생겨난다고 한다.


페낙은 교육에서의 사랑이 학생들이 미친 새처럼 날아갈 때 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학교생활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은 날개가 부러진 제비를 고쳐주고, 기절한 제비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때마다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길을 따라가는 데 실패하고, 몇몇은 다시 깨어나지 못해 카펫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다음번 유리창에 목이 부러지기도 한다. ··· 하지만 매번 노력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학생이니까. 이 아이 혹은 저 아이에 대한 호감이나 반감(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문제이긴 하지만!)의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우리 감정의 정도를 말한다는 건 너무 쉽다. 지금 문제가 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기절한 제비는 되살려야 하는 제비일 뿐이다. 그뿐이다. - 다니엘 페낙(2014), 위의 책, 371쪽.     


우리에게는 ‘기절한 제비’가 몇이나 될까. 텅 빈 가방을 매고 학교에 오고, 하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기절한 제비’로, 그러니까 우리 모두 힘을 합해 ‘되살려야 하는 제비’로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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