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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05. 2016

“옛소 점수! 먹고 떨어지세요.”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8)

1     


가끔 이렇게 자문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 누구일까. 세대별로 엇비슷하게 “바로 우리요!” 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힘들다, 못 살겠다.” 하고 아우성 치는 나라가 돼버렸다.


교사로 살다 보니 초․중․고교생들의 어려움이 유난히 크게 다가온다. 많은 10대가 현재를 좀먹듯 살아간다. 부모와 교사 등 주변 ‘어른들’ 탓이 커 보인다.


‘옛다 점수!’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성적을 지상 최대 과제로 여기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내보이는 태도를 냉소적으로 빗댄 말이다.


“너 몇 등까지 등수를 올리면 스마트폰 사 줄게.”


석차나 성적을 놓고 자식과 거래하는 부모들이 있다. 거래에 ‘동의한’ 아이들이 외친다.


“옛소 점수! 먹고 떨어지세요.”


어느 날 아이들이 표변한다.


“원래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난데없고 갑작스러운 ‘도발’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숨긴 모습을 내보인다. 부모의 상실감이나 배신감(?)은 어디에 견줄  없을 정도로 크다. 무기력과 반항보다 훨씬 무섭다.


‘성적 잘 받아오던’(!) 아이가 더는 성적 쌓는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빈둥거린다.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부모와 교사는 별로 다. 부모와 교사는 애먼 아이를 미워하고 탓한다. 예전 아이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틀려먹었다고 ‘옛날 타령’을 한다.


지난 시절 부모는 자식들에게 둘도 없는 모범생처럼 그려진다. 성실과 정직의 표상이다. 혜안과 사려 깊은 독심술로 자식의 마음을 꿰뚫는 예언가가 된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엄마, 아빠 모두 알고 있어.”


이어 말한다.


“자, 진심을 말해 봐. 왜 이러는 거야?”


아이들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냥요.”  

   

2     


아이들은 ‘그냥요’라는 말을 즐겨 쓴다. 좋은 일에든 그렇지 않은 일에든 한결같다. 무언가 한 마디 해 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에게 건성으로 대꾸하듯 말하는 아이들의 ‘그냥요’는 인내심을 시험한다. 과거의 고분고분한 자녀만 떠올리는 부모는 자식을 ‘괴물’처럼 여긴다. 교사는 권위에 도전하는 거냐며 분을 삭이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본다. ‘그냥요’는 말 그대로 ‘그냥요’가 아닐까. 몇 년 전 학기 초 학교에 오신 찬수(가명) 아버지와 나눈 대화 한 토막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찬수가 담배를 피우다 학생부 선생님에게 걸렸다. 학교에서 호출했다. 그즈음 다른 일로 학교에 몇 번을 오셨다. 교무실에 있는 다른 선생님들 보기 힘들어하실 것 같아 함께 밖으로 나갔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애들이 친구들과 가출하잖아요. 그것도 그냥 하는 것 같아요.”


찬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런 거 있잖아요. 그냥 친구가 좋으니까 이유 없이 친구들과 놀고 싶은….


찬수 아버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따지고 보면 특별한 이유 없이 하는 일들이 많다. 왜 사는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냥’ 산다. 어떻게 사는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산다. 우리에게는 삶의 목표와 비전 따위를 생각할 여유와 한가함이 별로 없다.


“아이는 그냥 한 건데 먼저 따지고 추궁하고 그랬어요. ‘솔직히 말해봐. 이래저래 해서 그렇게 한 거잖아. 그렇지 않아?’ 하면서 말이지요.”


찬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맞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그냥요’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편견을 따르면서 지레 재단한다. 아이들은 자포자기하듯 ‘네’ 하고 대답한다. 매섭게 추궁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꼴이다.     


3     


‘그냥요’라는 말에는 10대들 특유의 과잉 행동 성향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 행동은 신경 단위의 독특한 특성과 관련된다. <뉴욕 매거진>의 베테랑 기자 제니퍼 시니어는 <부모로 산다는 것>에서 뇌 과학자들의 최신 연구 결과를 원용해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인간의 전체 생애 단계 가운데 사춘기에 가장 왕성하게 분출된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사춘기를 지나고 나면 사춘기 때 느꼈던 감정의 격렬함을 결코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다. 게다가, 뇌 가운데서도 고도의 실행 기능(계획하고 추론하는 능력, 충동을 자제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을 제어하는 부분인 전전두엽 피질에서는 결정적인 구조 변화가 여전히 진행 중인데, 이 변화는 이십 대 중반이나 심지어 이십 대 후반에 가서야 완전히 종결된다. - 제니퍼 시니어(2014), <부모로 산다는 것>, RHK, 341쪽.     


전전두엽 피질의 완성되지 못했으니 십 대 아이들에게 계획과 추론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일까. ‘진행 중’이라는 말에 주목하자. 시니어에 따르면 인간은 사춘기를 맞이하기 직전에 전전두엽 피질이 갑자기 엄청나게 활발히 활동한다. 덕분에 아이들은 추상적인 내용을 보다 잘 파악하고 여러 다른 관점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사춘기 아이들이 따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도 이들이 새롭게 얻게 된 이런 능력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시니어는 사춘기 아이들이 어른들처럼 장기적인 차원에서 빚어지는 결과를 추정하거나 복잡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일에 서투르다고 지적했다. 시니어는 이런 아이들의 특성을 “노련한 어른들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시시한 것들을 쓸데없이 주장하면서, 여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열정적으로 쏟는다”고 표현했다. ‘그냥요’가 만들어지는 배경이 아닐까.     


4     


‘살겠다’는 의지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때가 되어 세상에 ‘그냥’ 나와 ‘그냥’ 살아간다.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냥’ 밥을 먹고, ‘그냥’ 사람을 만난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어른들이 ‘그냥’ 사(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을 껴안아 줘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많은 이가 ‘어른애’를 들먹이면서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꿔 보면 어떨까.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자식으로부터의 부모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와 자식이 공멸하는 무서운 세상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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