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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30. 2016

단어가 콸콸 쏟아져 나오다

사람의 언어 습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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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보면 놀랍다. 대다수가 언어 습득을 위한 특별한 사전 계획이나 연습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깨우친다. 아이들이 모어 구사 능력을 완성하는 시기는 대체로 4~6세 무렵이다. 몇 단계의 역동적인 언어 습득 과정을 거친다. ‘전 언어 단계(pre-linguistic stage) → 한 단어 단계(one-word stage) → 두 단어 단계(two-word stage)’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전 언어 단계’는 생후 12개월 동안에 걸쳐 있다. 이 시기 아기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언어를 이해하고 산출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아기들은 사람 목소리와 자동차 경적 소리, 남자와 여자 목소리를 구별한다. 태어난 지 1개월 된 유아는 ‘pa(파)’와 ‘ba(바)’ 소리를 나눠 듣는다. 2개월을 지나면서 음색이나 음량을 풍성하게 하여 ‘우우우’ 같은 모음 소리를 낸다. 이 ‘목 울림(cooing)’ 소리는 아기들이 기분이 좋을 때 낸다.


생후 6개월 무렵부터 ‘옹알이(babbling)’가 시작된다. 옹알이가 출현하는 시기나 옹알이로 내는 소리 유형은 모든 언어권에 걸쳐 보편적인 경향을 보인다. 옹알이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기들에게서도 예외 없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시기 아기들은 혀를 차거나 흠흠거리거나 입맛을 다시듯 내는 소리들로 옹알이를 한다. 처음부터 뚜렷하게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좀 더 분명한 자음이나 모음 소리를 결합하여 소리를 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절을 여러 번 되풀이하여 종알거린다.


10개월쯤에 접어들면서부터 아기들의 말소리는 어른 말소리의 억양과 비슷해진다. 옹알이 단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향 언어(echolalia)’ 덕분이다. 반향 언어는 옹알이를 통해 좀 더 또렷해진 음절이 ‘다다다다’처럼 연속적으로 나오는 소리다.


막내딸은 2011년 8월에 태어났다. 녀석은 ‘아바바바’, ‘암맘맘마’, ‘바마마마’ 같은 다양한 반향 언어를 7, 8개월경부터 또렷하게 내기 시작했다. 가장 선호한 반향 언어는 ‘아바바바’였다. 우리 부부가 손바닥을 녀석 입에 대고 연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살살 두드려 주면 싫증 한 번 내지 않고 ‘아바바바’ 소리를 냈다. 아기들은 이런 소리 내기를 장난이나 놀이로 여겨 무척 좋아한다.


아기들이 소리에 대해 선택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는 10개월 무렵이다. 이 시기에 아기들은 자신들이 듣지 않는 소리는 내지 않는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계속 따라서 내는 경향을 보인다. 소리에 대한 일종의 피드백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청각 장애아들이 더는 옹알이를 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 이들과 부모 사이에서는 소리에 대한 선택적인 반응으로서의 피드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아기들은 만 1세 무렵부터 ‘한 단어 단계’, 또는 ‘일어문(一語文)’ 단계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 아기들이 내는 단어는 옹알이 사이에 출현하는데, 성인들이 내는 단어와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어떤 물건이나 행위를 일관되게 가리키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한 단어’를 쓰기 때문에 정상적인 단어로 본다. ‘일어문’이라는 명칭은 단어 한 개가 문장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어문으로 쓰이는 단어 대다수는 음식, 신체 부위, 옷, 장난감, 동물, 사람에 관한 것들이다.


아기들은 최초의 단어를 산출한 후 얼마 동안 단어 습득 속도가 매우 느리다. 맨 처음 단어를 습득한 이후 10개의 단어를 익히는 데 3, 4개월이 걸린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아기들의 언어 습득, 특히 어휘 수용 능력은 생후 16~18개월을 지나면서 놀라울 정도로 커진다. 아기들은 이 시기에 이르러 2시간당 하나꼴로 단어를 습득한다고 한다.


이 시기는 땅에서 물이 솟아 나오듯이 아기들의 입에서 단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단어 용출기(湧出期, word-spurt period)’나 ‘어휘 폭발기’로 표현된다. 개인마다 편차가 있지만 아기들은 18개월째에 50개, 24개월째에 300개 정도의 단어를 갖게 된다.


3


‘두 단어 단계’는 18개월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가 되면 아기들은 최소 두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구사한다. 그래서 ‘이어문(二語文)’ 단계로 불린다. 이어문 단계는 아기들이 만 3세가 되기 전인 생후 30개월경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지는 문장은 짧고 단순하다. 주어나 목적어나 서술어는 의미 전달에 필수적인 최소의 문장 성분들이다. 아기들은 이들 문장 성분을 명사나 동사나 형용사 같은 품사(단어) 형태로 전달한다. 예를 들어 과자를 먹고 싶을 때 “나는 과자를 먹고 싶어요”가 아니라 “나 과자”, “과자 먹어”처럼 쓴다.


아기들은 짧은 문장을 통해 점진적으로 문법의 다양한 요소들을 익힌다. 모어 습득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어순도 이렇게 해서 익힌다. 아기들은 “나 과자”에서 ‘주어+목적어’ 어순을, “과자 먹어”에서 ‘목적어+서술어’ 어순을 배운다. 이들을 종합해 우리말의 기본 어순인 ‘주어(Subject)-목적어(Object)-서술어(Verb) 구조’를 머릿속에 갖춰 넣는다.


4


아기들은 이어문 단계를 지나 30개월을 넘기면서부터 성인들이 쓰는 완전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 능력을 갖춘다. 문장을 짧게 하려는 경향이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개의 단어를 배합하여 문장을 만드는 수준이 이어문 단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다양한 문장 형식의 밑바탕에 깔린 통사 구조, 곧 문장의 기본 뼈대를 익히면서 문법 능력을 현저하게 발전시킨다. 그래서 이 시기를 16~18개월 무렵의 ‘어휘 폭발기’에 견줘 ‘문법 폭발기’로 일컫기도 한다.


이때 아이들은 ‘과잉규칙화’라고 부르는 독특한 말하기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둘째는 주격조사를 중복한 ‘-이가’ 표현을 즐겨 쓴다. 예컨대 “김 ○○ 선생님이가 좋아요.”, “공룡책이가 어디 있어요?”처럼 말한다.


둘째의 뇌에는 이미 주격조사 ‘-이’와 ‘-가’의 의미나 쓰임새에 관한 규칙이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만으로 충분한 자리에 ‘-가’를 씀으로써 규칙을 이중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거다요’ 표현도 과잉규칙화의 범주에 속하는 언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과잉규칙화에 따른 말하기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모방하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규칙을 깨우치면서 모어를 습득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다. 왜 그럴까.


‘거다요’는 원래 형태가 ‘것이다요’다. 경어법을 익히고 있는 둘째가 요즘도 즐겨 쓰는 표현이다. 우리말 높임 표현 체계에서 ‘두루높임’에 해당하는 ‘요’를 지나치게 일반화하여 사용한 예로 볼 수 있다. 영어를 배워가는 어린아이가 처음에 ‘foot’의 복수형을 ‘feet’가 아니라 ‘foots’로 하거나, ‘go’의 과거형을 ‘went’가 아니라 과거를 나타내는 접미사 ‘-ed’를 붙여 ‘goed’로 쓰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들이 모방이나 의식적인 학습을 통해 이 말들을 배운다면 처음부터 ‘것이에요’나 ‘거예요’, ‘feet’, ‘went’ 등을 사용했어야 한다. 우리 부부가 둘째 앞에서 ‘선생님이가’, ‘책이가’, ‘거다요’를 말한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성인 화자 중에 아이들 앞에서 ‘foots’, ‘goed’를 사용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5


아이들의 모어 습득은 만 4, 5세가 되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모어에 쓰이는 소리를 대부분 발음할 수 있고, 기본적인 문법 규칙이나 요소를 활용하는 능력 또한 성인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 시기 아이들이 성인과 다른 점은 다만 구사할 수 있는 어휘 수나 발음의 자연스러움에 따른 차이뿐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갖게 되는 단어 수는 1만 3000개 정도 이른다고 한다. 300개 정도에 불과한 두 살 무렵부터 계산하면 연 평균 3000여 개, 일일 평균 8개의 어휘를 습득하는 셈이다.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6


아기들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두뇌와 언어 능력 간에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상호 작용을 보여 준다. 이제 언어 습득 능력과 유전자 간의 관계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FOX P2 유전자를 중심으로 살피면서 이 장을 마무리하자.


2001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이 <네이처>에 ‘FOX P2’로 명명된 유전자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수년 간 ‘KE’라는 이니셜로 명명된 영국의 한 가문을 관찰했다. 이 가문의 3세대를 분석한 결과 대상자 31명 중 절반 정도인 15명이 심각한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말소리를 구별하고 문장을 이해하며 문법성을 판단하는 데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문제의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돌연변이 상태의 FOX P2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구팀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FOX P2 유전자가 언어 장애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언어 구사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로 FOX P2를 지목한 것이다.


그렇다면 FOX P2 유전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언어 유전자인가. 그렇지 않다. 언어 유전자로서의 FOX P2 유전자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유전자의 어떤 변이가 특정 행동의 발달과 관계를 맺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FOX P2 유전자의 유전자 변이가 한 사람의 언어 기능에는 영향을 주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최신 연구 결과도 있다. FOX P2 유전자가 뇌 속에서 하는 일이 다른 유전자의 활동과 중복되어 있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FOX P2 유전자의 유전자 변이가 불러오는 뇌세포의 변화에 언어 능력의 심각한 손실과 같은 현상이 포함되는가 하는 점도 논란거리다. FOX P2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손상되면 다른 세포들이 다른 유전자들을 더 많이 산출하는 보상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보상 현상에 따른 반응들로 말미암아 언어 능력과 관련된 세포에 비정상성이 나타날 수 있다. 사람이 언어 능력을 잃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FOX P2 유전자의 돌연변이 탓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FOX P2 유전자는 여전히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구별하고 사람이 갖는 언어 능력의 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로 활용되고 있다. 사람과 다른 동물 사이에서 드러나는 FOX P2 유전자의 차이는 아주 미미하다고 한다. 실제로 전체 유전자 차원에서 인간과 침팬지는 거의 99퍼센트에 가깝게 서로 유사하다. 차이는 단 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차이 때문에 인간과 동물의 단백질이 서로 다르게 만들어지고,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겉모습과 능력을 갖게 된다. 지구 생명체 중 오직 인류에게 언어를 갖게 해 준 인간 두뇌의 신비도 그 1퍼센트 안에 들어 있지 않을까.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세계적인 언어학자 놈 촘스키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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