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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29. 2016

“얘들아, 너희는 우리처럼 살거라”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7)

1

     

힘들었던 한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1990년대의 10년 동안이 특히 그랬다. 지방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으로 서울에서 학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챙겨야 했다. 달동네 코딱지만한 사글세방을 전전했다.


정말 힘들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거야.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왜 날 이 힘든 세상에 내보낸 거지.’ 그 모든 삶의 선택은 내가 한 것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말없이 나를 지지해 주셨을 뿐이다.


실상 부모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다. 고3 시절, 서울 소재 사립대학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단 한 마디 말씀으로라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대학 입학에 관한 한 ‘인 서울(in Seoul)’이 별로 큰 매력이 없던 1980년대 후반이었다. 그렇더라도 두 분께는 정말 큰 결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집안의 경제적 상황은 절대적으로 여의치 않았다.     


2     


1985년 2월, 어느 시린 겨울 아침을 기억한다. 그날 따라 아버지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표정이 약간 들떠 있으셨던 것 같다.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고 순천행 버스를 탔다. 궁금한 마음에 버스에서 무슨 일이냐며 여쭤봤다. 아버지께서는 딱히 대답하지 않으셨다.


순천 터미널에 도착했다. 코끝이 여전히 매서운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햇살만이 눈부시게 빛나는 날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이끌고 간 곳은 터미널 인근의 순천 아랫장이었다.(순천에는 5일장이 두 번 선다. 지리적으로 남쪽에 서는 장을 ‘아랫장’, 북쪽에 서는 장을 ‘웃장(윗장)’으로 부른다.) 그때서야 눈치를 챘다. ‘자취방 살림살이를 챙겨 주시려고 하는 거구나.’


순천에서 아주 먼 산골 마을이 고향이었다. 족히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 벅찼다. 아랫동네 선배가 지내는 자취방을 함께 쓰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선배는 책가방과 몸만 가지고 오면 된다고 했다. 그럴 순 없었다. 지레 아버지께서 자취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사 주시려나 보다고만 생각했다.


발걸음을 옮겨 들어간 곳은 가구집이었다.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바라던 책상 일습을 챙겨 주시려던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 책상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조금 잘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상이라도 보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를 졸라댔다. ‘대체 자식에게 방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라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하다못해 사과 궤짝 같은 것으로 앉은뱅이 책상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투정을 부렸다.


가구점 주인은 사람이 없어 배달을 못 한다고 했다. 그런 법이 어딨냐며 아버지께서 언성을 높이셨다. 더는 어찌할 수 없었다. 직접 들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걸상을 책상 위에 올려 끈으로 묶었다. 책상 앞뒤 좌우 귀퉁이를 잡고 가구점을 나섰다.


햇살이 조금 더 따사로워져 있었다. 겨울 아침 칼추위는 여전했다. 가구점을 나와 거리를 삼십여 분 걸었다. 자취방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속으로 ‘아버지!’ 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보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참 지혜로우셨다. 책상 하나로 자식을 그렇게 완전하게 사로잡아 버렸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실상은 ‘갑자기’가 아닐 것이다.) 바람을 채워주셨다. 늘 그랬던 것 같다.


자식들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놀게만 하지 않았다. 어떤 것이 되었든 일을 하게 했다. 쇠죽을 끓이거나 돼지 여물통을 채웠다. 나무청(나뭇단을 보관해두는 곳)에 있는 나무들을 정리했다. 동네 여느 집 부모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특히 더 그러셨다.     


3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배신한다. 다음과 같은 말이 따라붙는다.


“얘들아,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소설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마디마디에서 우리는 이 말 한 마디를 수없이 만난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부모를 배반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이구나.’


그리하여 자식들은 ‘가난하고 못난’ 부모가 살았던 삶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가난은 못난 부모 탓으로 귀결된다. 가난에 대한 인식의 어두운 대물림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가난을 죄악으로 보는 경악스러운 일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속악한 풍경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다반사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농군으로 사셨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운 농부임을 잊은 적이 없으셨다. 열 살 전후부터 꼴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아버지를 따라 다녔다. 아버지 고집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일과 농부에 대한 당신의 자긍심을 자랑스럽게 펼쳐 놓으셨다. 그렇다고 ‘나처럼 살아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씀도 한번도 하지 않으셨다. 앞에 주어진 삶이, 성실하고 충실하게 꾸려가야 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 주셨다.


우리 집과 부모님은 늘 가난에 쪼들렸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으셨다. 당신들 스스로 굴복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굴복을 대물림해 주지 않으셨다. 한 닢 동전조차 귀히 여기셨지만 그것에 휘둘린 적은 없었다. 돈 차제가 목적이 되어 자식들 앞에서 ‘돈이 귀하니라’ 따위의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이런 말을 내뱉는가. 돈이 최고라고 한다. 무조건,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라고 한다. 좋은 직장 얻으라는 말을 낯 한번 붉히지 않고 자식들에게 말한다. 10억을 벌 수 있다면 감옥에 가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요새 아이들의 말이 그들만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겠는가. 이 사회가, 그리고 그 부모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공부해라, 좋은 대학 가라, 출세해서 돈 벌어라’ 하고 말하는 이들이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목울대를 울리면서 말한다.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4  

   

이제 그 말은 가난한 부모와 부자 부모를 가리지 않는다. 그들 모두 이 사회가 불안 사회라는 것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안다. 절절하고 애끓는 그 속내를 어찌 모르겠는가. 실상 대한민국 부모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이 사회가, 만인을 향한 만인의 기약 없는 싸움을 부추기는 이 거대한 시스템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이 사회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불안 때문이다. 가난하건 부자건 그들은 자식에게만은 그 불안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역설이 생겨난다. 부모들이 그렇게 말할수록 없어져야 하는 불안이 더 커진다!


‘내 든든한 우군인 부모마저도 저런데, 대체 내가 이 사회와 시스템을 잘 견뎌나갈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부모와 자식들은 상대방을 예의 기약 없는 싸움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부모들이 말한다. ‘이제 너희가 필요 없으니 알아서들 잘 해 보거라.’ 자식들도 지지 않는다. ‘당신들은 내 수단일 뿐이야.’


자식 앞에서, 세상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가난과 못남의 전부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부모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에 임했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그리고 자식을 다른 이들과 견주지 않는 인생을 꾸려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각자의 삶에 충실하되, 서로 어깨를 겯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자식들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우아하고 품위 있게 빛나는 삶을 자식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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