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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29. 2016

“가르침은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기 위함이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6)

1

    

“선생님,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


고개를 끄덕였다. 성훈(가명)이가 교실을 후닥닥 빠져 나갔다. 아이들에게 몇 마디 했다.


“얘들아, 화장실에서 급하게 용무를 보고 싶으면 손을 살짝 들어 눈짓으로 말하고 다녀오면 돼. 용무 보는 일을 허락 받고 다녀오는 건 옛날 노예들이나 하던 일이었어.”


‘노예’라는 말에 아이들이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을 부담스러워한다. 가령 조퇴를 하러 오는 아이들 태반이 부모님께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화 통화를 한 뒤 ‘허락’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정식으로 조퇴 요청을 한다.


아이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을 부모가 아는 일을 나무랄 건 아니다. 조퇴 여부를 결정하는 데 학교 밖에 있는 부모가 ‘보호자’로서 일정하게 관여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아이들은 그 자신의 주인인가. 아이들 몸과 정신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보호론의 궁극적 효과는, 기본적으로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유지함은 물론이거니와, 보호받는 자로 하여금 ‘보호받는다’는 허위의식을 갖게 하여 그들 스스로를 거의 항구적으로 정치적 약자로만 머물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 김성윤(2014), <18 세상>, 북인더갭, 290~291쪽.     


김성윤은 청소년 보호와 청소년 억압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주장했다. 청소년활동가 호야는 <오늘의 교육> 최신호(2016년 9・10월호, 제34호)에서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는 나이주의와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이데올로기”(31쪽)로 규정하면서 “나이주의와 연소자 차별, 나이와 경험-능력이 비례한다는 편견 등은, (중략) ‘미성숙의 악순환’이라 불리는 굴레가 되어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뿌리로 작동한다”(31쪽)고 주장했다.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가 나뉘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둘 사이의 위계,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유지된다. 보호하는 자는 보호받는 자가 무엇을 해도 되거나 하면 안 되는지를 검열하고 결정하여 차단, 박탈, 통제, 구속을 실행한다. 보호받는 자는 행위에 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보호의 특성에 따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과는 뒤바뀌어야 한다. 약자이므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기 때문에 약자로 남는 것이다. - 호야(2016), ‘보호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하지 않는다’, <오늘의 교육> 제34호, 교육공동체 벗, 32쪽.     


2     


이 세상 부모들이 원래부터 자녀들을 ‘보호’하면서 온갖 정성과 관심으로 키웠을까. <뉴욕 매거진>의 베테랑 기자 제니퍼 시니어가 쓴 <부모로 산다는 것>을 보니 미국 부모가 지금과 같은 양육 방식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였다. 채 70여년이 되지 않는다.     


부모로서 우리는 때로 우리가 놓여 있는 이런 환경이 과거의 환경과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놓여 있는 이런 환경과 상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새로운지 그리고 얼마나 특이하고 비역사적인지 명심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여전히 건설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 (중략) 70년이라는 세월을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보면 그야말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는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 제니퍼 시니어(2014), <부모로 산다는 것>, 알에이치코리아, 216쪽.     


그 전시대 아이들은 노동을 했다고 한다. 농장이나 거리, 공장 등에서 일을 하는 것을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가족 경제에 보탬을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일방적으로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역사학자 스티브 민츠에 따르면, 19세기 이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뉴잉글랜드 식민지들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그거’나 ‘어린 낯선 놈’으로 불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그들은 보호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촛불이나 난로에 화상을 입고 죽었으며, 강이나 우물에 떨어져 죽었으며, 독약을 먹고 죽었으며, 뼈가 부러져 죽었으며, 핀을 삼키고 죽었으며, 콧구멍에 견과가 끼여서 죽었다”.[제니퍼 시니어(2014), 위의 책, 209쪽]


아이나 어린이(child)에게 고착화한 이미지는 ‘보호’보다는 ‘의존’이었던 듯하다. 정용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이 쓴 ‘나이주의와 교육’(<오늘의 교육> 제34호)이라는 글에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들이 나온다.


17세기 이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주인(master)에 대해 의존할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 예컨대 종복과 직공과 군인 등은 모두 ‘어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장인(master)은 자신의 도제에게 “Come along, children, gor to work”라고 말했다. 지휘관은 그의 부하에게 “Courage, child-ren, stand fast”라고 용기를 북돋았다. 최전방에서 위험에 노출된 부대는 “잃어버린 아이들”이라고 명명되기도 했다고 한다.    

 

3     


미국의 경우, 아이들이 가족의 새 ‘권력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아동 노동 금지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때부터 가족 경제의 부담은 오로지 부모에게 맡겨진다. 아이들은 ‘돈 먹는 하마’가 되었다.


아이들은 양육 과정에서 손아랫사람에서 손윗사람으로까지 바뀌는 경우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제 손윗사람이 돼버린 아이들은 가족 내 질서를 교란한다. 시니어는 몇몇 사회학자의 말을 빌려 아이들의 성스러운 지위가 전통 가족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말했다.


가령 도시계획 전문가인 윌리엄 화이트는 1953년 <포춘>에 게재한 기사를 통해 전후의 미국을, 자식이라는 뜻의 ‘filia’와 무정부 상태라는 뜻의 ‘anarchy’를 합성한 신조어 ‘Filiarchy’로 묘사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런 역전 현상은 오늘날 중산층에 한층 뚜렷한 행동 결과를 낳았는데, 라루는 <불평등한 어린 시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산층의 어린이는 자기 부모에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서 대들고, 자기 아버지의 무능함을 불평하며, 부모가 내린 판단을 헐뜯고 방해한다.” - 제니퍼 시니어(2014), 위의 책, 213쪽.  

   

오늘날 많은 부모가 생각하는 양육 방식이나 태도상의 원칙, 자녀에 대한 관점은 매우 허술한 인식 토대 위에 쌓여 있다. 가히 ‘전쟁’으로 부를 만한 교육 문제는 어떨까.

    

4


‘트로피 아내’라는 기이한 말이 있다. 능력과 재력을 갖춘 남자가 성공에 대한 보상으로 얻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풍자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이와 비슷하게 ‘트로피 아이’가 있다. 자녀가 이룩한 비범한 성취를 자랑하고 싶은 부모들을 꼬집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요새 아이들은 정말 바쁘다. 대체로 부모의 계획과 뜻에 따른 결과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정규 수업과 방과후 보충 수업을 마치고 나면 늦은 밤까지 여러 학원을 돈다. 시니어는 과도한 일정이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자유와 그런 게으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상상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비판자들의 의견을 제시한다.


미국 중산층의 교육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집중 양육’ 개념이 있다. 2002년 사회학자 아네트 라루가 써서 고전 반열에 오른 <불평등한 어린 시절(Unequal Childhoods)>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라루는 집중 양육을, 바쁜 부모에게 극심한 노동을 요구하고, 아이들을 지치게 만들며, 가족 집단이라는 발상이 성장할 기회마저 희생시키면서 개인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시니어가 묘사하는 미국식 집중 양육(교육)의 결과는 서늘하다. 부모의 배려를 감지한 (특히 중산층의) 아이들이, 과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했던 거친 말과 욕을 자신들의 부모에게 돌려준다. 부모의 배려와 관심 등으로 충분한 권력을 부여받은 아이들이 부모들의 그런 태도 때문에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고 심지어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으며,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내면적인 압박감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간에) 점점 더 커진다. (중략) 다른 나라 그리고 다른 시대라면 노인을 봉양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시민 리더십을 발휘하고 봉사 활동을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이런 과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지금 미국에서는 양육과 관련된 책들이 이미 성서가 되어 버렸다. - 제니퍼 시니어(2014), 위의 책, 294쪽.     


시니어는 말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상실을 피할 수 없다. 아이가 어느 날 자기를 훌쩍 떠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서 강하게 키우는 것이 부모가 수행해야 하는 역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5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이 아이들이 머지않아서 우리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물의 사랑(부모가 자녀에게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을 가리킴.)에는 무거운 과제, 스스로를 파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 작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1898~1963)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영국 작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사진이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C._S._%EB%A3%A8%EC%9D%B4%EC%8A%A4)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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