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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27. 2016

“학업 부진아 수업? 그냥 하기 싫어요”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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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초였다. 1학년과 2학년 저소득층 가정 자녀들을 중심으로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을 선발(희망자 대상)해 국영수 보충반을 편성, 운영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들려오는 말을 종합해 보니 교육청 예산이 있어서 신청해 지원받은 모양이었다.


‘망각’을 핑계로 미루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의향을 물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아무도 희망하지 않았다. 학원에 다니느라 시간이 없다, 그냥 하기 싫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의 속을 모르지만 이해는 한다. 경험으로 보건대, 그들은 공부 못하는 동료들끼리 서로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 내면의 깊은 곳에 낙인에 대한 두려움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숨어 있다고 확신한다.


교사들과 교육당국은 이른바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을 걱정한다.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셈하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안타까워한다. 그들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쓴다. 그들의 ‘진정성’과 교육자로서 갖는 ‘양심’을 믿고 싶다.


문제는 방법과 방향이다. 학생들의 기초학력 부진론을 운위하는 교육당국과 교사들의 고민 지점을 따지다 보면 답답해질 때가 많다. 기초학력 개념은 타당한가. 기초학력 부진아들을 따로 모아 교육을 시키는 방법은 효과가 있는가.     


2     


'배움의 공동체 운동'을 주창한 일본 교육학자 사토 마나부는 기초학력 개념의 ‘고갱이’인 읽기, 쓰기, 셈하기를 ‘리터러시(literacy)’로 규정한 뒤, 기초학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리터러시라는 말의 용법은 17세기 영국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그때의 리터러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요즘 미국에서도 보통 리터러시란 ‘기능적 리터러시’라 하여 식자와는 구별한다.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공통교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 기초학력을 정의한다면 리터러시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므로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교양을 ‘기초학력=리터러시’라고 설정해야 할 것이다. - 사토 마나부(2016), <사토 마나부, 학교 개혁을 말하다>, 에듀니티, 206~207쪽.     


사토 마나부가 일본 교육에 대해 지적한 문제와 거의 비슷하게 우리나라에서 기초학력은 읽기와 쓰기와 셈하기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이들 문제를 해결하면 기초학력 문제가 해소된다고 본다. 그럴까.


교사들은 특정 수준에서 아이들이 막히면 그아래 수준의 내용으로 내려가 가르치려고 한다. 중딩 수포자에게 초등 수학을 가르치는 식이다. 사토 마나부는 기초적인 지식이나 기능일수록 ‘반복적인 연습’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기능적으로 습득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학력이 기초에서부터 형성되지 않고 위에서부터 끌어올려 형성된다고 본다.     


학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돌아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할 수 없는) 수준의 내용을 교사나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모방하고 이를 스스로 내화해야 한다. - 사토 마나부(2016), 위의 책, 211쪽.   

  

3     


고등학교 시절 내 성적은 상위 30퍼센트대였다. 일반적인 의미의 ‘공부 잘한다’는 말은 듣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나, 무언가를 배우는 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전반적으로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성적이 ‘탁월하게’ 좋은, 정말로 ‘공부 잘하는’ 친구들, 은근과 성실과 끈기의 자세로 공부 자세의 ‘기본’을 온몸으로 보여준 친구들이 주변에 두루 있었다. 그들과 흉허물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공부하는 태도를 따랐다. 그들의 공부 방법을 곁눈질로 익히면서 스스로 내 공부 방법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 나갔다. 그 과정들이 나름대로 괜찮았다. 나 또한 30퍼센트대 이하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했다.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이 모두 다양한 또래 집단 간 유대 관계가 영향을 미친 사례로 자평할 수 있으리라 본다.

 

기초학력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기초학력’이 특정 연령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한글을 모르면 기초학력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중학생 1학년 학생이 곱셈을 모르면 심각한 저능아처럼 취급받는다.


이제 그들은 교사와 동료 학생들의 눈밖에 난다. 초보적인 기초학력 미달자가 구제불능의 학업 지진아로 취급받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그들에게 부족하다는, 기초학력을 구성하는 ‘지식’들이 과연 그들을 그렇게 취급해도 될 정도로 정당한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정용주의 다음 말에 주목해 보자.     


지식이란 섬유 조직 같은 것으로서 온갖 정보, 이미지, 관계, 실수, 가정, 기대, 유추, 모순, 빈틈, 예감, 규칙, 일반화 등이 뒤섞여 있는 그물망과 비슷하다. 따라서 지식은 영원불변하며 선험적인 실재가 아니며, 관계망 속에 있는 것이다. 학년에 따라 교과의 발달 과업을 구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주제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표상, 재표상하며, 각 매체가 가진 특성들이 서로 통합되면서 그 주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와 안목이 넓어진다. 따라서 학습은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모든 학습자들이 공동 책임자로서 다면적인 역할을 해 나간다. 교과마다 배움의 속도 또한 다르다. - 정용주(2016), ‘나이주의와 교육’, <오늘의 교육>(9・10월호, 제34호),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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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기초학력론은 수준별 우열반 교육으로 이어진다. 이는 학습능력이나 이해도가 비슷한 아이들이 그룹으로 모여 함께 배우는 것이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통념에 기초한다. 성적이 안 좋은 아이들이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부담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나 자신의 공부 경험과 교사로서의 교육 경험을 두루 고려할 때 그릇된 생각들이다.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학습자 자신의 내적 ‘의지’와 주변의 학습 ‘환경’이 어우러질 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의지와 환경은 상보적 관계에 놓인다.     


‘수준별 지도’는 ‘혼자서 도달할 수 있는 단계’에 맞춘 교육이며, 습숙도나 능력이 균질화된 집단에 있어서의 개인주의적인 배움이며, 협동의 계기를 상실한 배움이다.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협동’으로 서로 배우는 곳이야말로 ‘발돋움과 점프’를 한 명 한 명에게 보장하는 역동적인 배움이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 사토 마나부(2016), 위의 책, 153쪽.     


1916년 미국 사회학자 리다 하니판(Lyda Hanifan)이 최초로 고안했다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논지를 뒷받침해 보자. 사회적 자본은 “개인들 사이의 연계,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다.[아래 ‘사회적 자본’과 관련된 연구사, 주요 내용 등은 로버트 퍼트넘(2009), <나홀로 볼링(Bowling Alone> 페이퍼로드. 참조)


정치학자이자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정책대학원 교수인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이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나 학교 생활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사회적 자본은 학생 성적과 비례하고, 학업 중퇴 비율과 반비례한다.


1990~1996년 사이 미국 48개 주 인종 구성, 경제적 풍요와 불평등, 성인 교육 수준, 빈곤율, 교육비 지출액, 교사 월급, 학교 크기, 가족 구조, 종교, 사립학교 부문 크기 등 주 교육정책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들을 고려해도 사회적 자본의 유익한 영향이 유효했다고 한다. SAT(미국 대학 입학 시험) 점수의 경우, 인종과 빈곤과 성인 교육 수준의 영향은 간접적일 뿐이었다.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예측할 수 있는 보다 강한 지표는 주의 ‘공식적’인 제도화된 사회적 자본의 수준보다 ‘일상적’인 사회적 자본의 수준이라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민이 클럽 모임, 교회 참석, 공동체 프로젝트 동참에 할애하는 시간의 양보다는 그 주의 사회적 신뢰의 수준, 그리고 사람들이 (카드게임, 친구 방문 등등에서) 서로 일상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 횟수가 학교 성적과 훨씬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중략) 사람들이 서로 유대 관계를 맺는 공동체에는 어린이의 교육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 투박한 증거는 말하고 있다. - 로버트 퍼트넘(2009), <나홀로 볼링>, 페이퍼로드, 495쪽.

    

교실과 교사 효과성에 대한 메타분석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폭넓게 인정받는 연구 중 하나인 존 해티(John Hattie)의 <Visual Learning>에서도 ‘학급 환경’(56)과 ‘동료 간 교수 활동’(50)의 영향이 ‘교사 유형’(42)이나 ‘학업 우수자 조직(advanced organisers)’(37)의 영향보다 크기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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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시절, 싸움에 젬병이던 나는 주먹 힘이 강해 권투 선수로 뛰었던 한 친구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게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여전히 ‘실전’에는 약했지만 그 친구로부터 ‘이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싸움 비결을 들으면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공부도 마찬가지 아닐까.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게 필요하다. ‘기초학력반’과 ‘우열반’에 의한, 낙인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을 막을 수 있는 한 방법이 아닐까. 교실은 다양한 ‘수준’의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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