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Sep 26. 2016

우리 반 ‘1등’을 알고 싶지 않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4)

1


새 학년 준비로 분주했던 지난 2월 말, 반 아이들 명단을 처음 받았다. 명렬표 마지막 칸에 전 학년 ‘성적’이 있었다. 보지 않았다. 아이들 성적을 보면 아이들이 성적에 따라 각기 달라 보였다. 어떤 선입관이 생겼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다.


올해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반 명단에 있는 아이들의 ‘전 학년 점수’ 칸을 외면했다. ‘1등’과 ‘꼴등’을 알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정기고사가 끝나면 성적을 확인한다. 교과 담당 교사들이 성적 일람표를 나눠주면 아이들이 점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맘때쯤이면 교무실과 교실과 복도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온통 점수 이야기를 나눈다. 100점 맞았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아이, 두루 ‘빡쳤다’며 분해 하는 아이, 1학년 때보다 올라서 만족했다는 아이 들들 반응이 다양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대체로 ‘쿨’하게 대꾸한다. 점수가 높거나 낮다는 게 ‘교육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여겨서다. 동의하기 힘든 사람이 많겠지만, 점수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배움의 즐거움 그 자체가 주는 보람이나 의미를 깎아내릴 수 있다.     


“공부의 결과는 그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깨우친 것, 알게 된 것이야.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얻어 낸 성적이 아니란 말이지. 성적을 알게 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하여 뭔가를 알게 된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속이는 것이 돼. 학교에서 공부한 결과가 점수로 평가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또한 자기 자신도 속이게 되는 거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을 이해하려 하는 대신, 그들의 성적을 가지고 그들을 판단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거야.” - 보 단 안데르센‧소렌 한센‧제스퍼 젠센(2016), <10대를 위한 빨간책>, 레디앙, 138쪽.

 

2

   

‘이중구속(double-bind)’은 정신분석 용어 중 하나다. 두 가지의 상호 배타적인 정보를 줌으로써 그 둘 모두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태와 관련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표면적으로 협력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강조한다. 이면에서는 경쟁 구조와 분위기를 통해 경쟁 심리를 주입하며 경쟁 행동을 부추긴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이 이중구속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대표적인 보기라고 말하고 싶다. ‘협력’은 교육 당국(교육부, 교육청)이 즐겨 쓰는 말 중 하나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경쟁 기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교원평가제나 성과급제를 버리지 않는다.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에서 이중구속이 가져오는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경쟁의 해악과는 별도로 이러한 ‘이중구속’의 주장들이 난무해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며, 심리적인 파괴를 불러온다. 이러한 모순된 메시지를 제공함으로써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겉모습만을 보고 패배에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패배를 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배운 ‘도덕적’ 격언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승리가 역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 알피 콘, <경쟁에 반대한다>, 산눈, 159~160쪽.     


3


지난 학기 1차 고사가 끝난 뒤 한 반에 들어가 ‘성적’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들 열 명 남짓에게 소회를 물었다. ‘어려웠다, 힘들었다’는 말들이 나왔다. 결과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궁금해 몇몇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족’의 기준이 뭐야? 어떻게 정한 거지?”     


부모님을 꺼냈다. 아빠나 엄마가 ‘목표’ 점수를 정해 주고, 그 점수를 넘으면 ‘성공’, 그렇지 않으면 ‘실패’라는 것이다. 대답하는 아이들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최근 몇 년 새 아이들에게서 눈에 띄는 모습이 보인다. 점수 ‘비교’를 당연한 것처럼 한다. 비교적 친한 친구 사이에 국한돼 있기는 한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수는 아이들에게 아주 민감한 정보 부류에 속한다. 내게는 서로 점수를 비교하는 아이들 모습이 낯설었다.


예전에는 시험이 끝난 뒤 반별 교과 성적표를 교실 게시판에 붙여 놓은 뒤 아이들에게 확인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개별적으로 결과표를 나누어 준다. 그런 아이들을 배려하려는 학교와 교사들의 조그만 변화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아이들이 성적과 점수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한다.


일부 아이들은 자신의 점수를 거리낌 없이 공개한다. 전체적으로 고득점을 얻은 아이들의 은근한 ‘자랑질’에서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인다. 평균 이하를 받은 꽤 많은 아이들도 자신의 점수를 당당히(!) 밝힌다.


나는 아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 점수를 내고, 그것으로 석차를 매기고 등급을 나누는 식의 성적 시스템을 유지하는 일이 ‘교육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점수와 등수의 위력은 막강하다. 교육적 의의 여하와 무관하게 하나의 ‘불문률’처럼 교육 현장을 강하게 지배한다.


4


아이들이 (높거나 낮은) 자신의 점수를 자연스럽게 밝히는 ‘현상’을, 그런 강고한 성적 시스템에 조그만 틈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점수라는 ‘신화’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깨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

 

아이들이 점수 때문에 서로 적대하고, 스스로를 끝없는 경쟁 구도 안으로 밀어넣느니 그렇게 ‘초탈’해 버리는 것이 지 않을까 싶어서다. 단언컨대 점수, 성적, 석차, 등급 ‘따위’는 그렇게 대해도 된다.

     

“점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습득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 주지 못해. (중략) 교사들은 점수를 통해 너희가 우정 어린 협력을 하는 대신, 경쟁하고 상호간에 라이벌이 되게 만들려고 하거든. 결국 점수를 통해서 너희를 그들 뜻대로, 행복하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야.” - 보 단 안데르센 외 지음, 목수정 옮김(2016: 139쪽), <10대를 위한 빨간책>, 레디앙.

     

점수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배움의 즐거움 그 자체가 주는 보람이나 의미를 깎아내릴 수 있다. 사람을 향한 시선이 줄어든다. 안데르센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을 꼼꼼히 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공부의 결과는 그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깨우친 것, 알게 된 것이야.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얻어 낸 성적이 아니란 말이지. 성적을 알게 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하여 뭔가를 알게 된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속이는 것이 돼. 학교에서 공부한 결과가 점수로 평가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또한 자기 자신도 속이게 되는 거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을 이해하려 하는 대신, 그들의 성적을 가지고 그들을 판단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거야.” - 위의 책, 138쪽.
작가의 이전글 ‘자신의 언어’가 없는 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